붓다로부터 법이 설해진이래 법으로써 성인이 생 하였네
성인의 문사수로 지혜의 핵심 본성 얻으니
궁극의 지혜 자량삼아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리라.
-보성론 여래장품-
러시아와 몽골 불자가 연합하여 14대 달라이라마(땐진갸초, 84)와 공식적인 법회 인연을 이어 온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달라이라마는 지난해까지 러시아 불자 주관 하에 라트비아 리가에서 법회를 열어왔다. 더불어 다람살라까지의 장거리 여정에 부담을 느낀 러시아 불자를 위해 수년간 인도 델리에서 단독 법회가 개최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달라이라마의 건강이 악화되고 지난 4월 폐 염증과 관련한 질환으로 델리 소재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게 되면서 이를 염려한 1,120명의 러시아와 몽골 불자 연합은 다람살라에서 법회를 여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번 법회는 위없는 마음에 대한 대승의 도리를 논한 보성론을 주제로, 5월 10일부터 3일간 개최되었으나 원문의 서문만을 다루었다. 전 세계 69개국에서 달라이라마의 이번 법회에 참석했으며, 대승의 보살계를 수하는 한편 달라이라마의 장수를 기원하는 기도 역시 함께 진행되었다.
인도에서 생한 불교는 북으로 향했습니다. 티송데첸 왕 당시 인도 나란다 승원에서 샨트락시타 승원장을 티베트로 모시면서 티베트불교는 그 체계를 본격화 하였습니다. 불교는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의 각 3장을 근간으로 삼습니다. 그 가운데 불교의 전반적인 핵심은 빠알리어에 기준을 둡니다. 무엇보다 빠알리어의 율장은 모든 불교국가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라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이 시대 21세기의 불자들이 불교를 통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 수행법, ‘마음 챙김’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감정의 변화를 스스로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나’라고 하는 아집을 제거하기 위해 무아에 초점을 두고 있는 수련법입니다. 번뇌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실집을 바로 헤아려 보다 분석적으로 사유하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마음 챙김입니다. 마음을 제어하는 방법론의 기반은 전적으로 불교의 사상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불교의 4대 학파,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중관에서는 무아를 통해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의 뿌리를 멸하기 위해 인무아와 법무아를 분석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무엇보다 현대과학의 양자물리학 분야에서는 실제 함이 단지 이름과 소리일 뿐이라는 명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차이에 대해 연구하며 공과 공성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을 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고정되어 불변 한다 여기는 집착의 개념이 점차 해체되고 재 성립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이 여러 스승님 중에 내몽골에서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수학 당시 반야와 중관에 대한 논서는 특별히 몽골 스님의 주석서를 많이 참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남인도에 재건된 티베트불교의 3대 사원에서 수학중인 몽골 스님 분들의 역량은 가히 으뜸으로 꼽을 만큼 도약하고 있습니다.
수행자여. 부디 부처님의 법과 역대 선지식의 논리를 면밀히 사유하여 수행자 본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마치 금을 연마하듯 붓다의 말씀조차 경험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깊이 사유함을 통해 수긍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법의 희열이란 이러한 순간 일어납니다. 나란다 승원의 전통 불교는 분석을 제 1의 의제로 두었습니다. 때문에 현대 과학과 맞대어 토론이 가능할 만큼 손색이 없습니다.
저는 항시 법회 때마다 21세기에 부합된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살이에서 과학이 증명하는 바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불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세상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합니다. 상대적으로 세계 곳곳은 살생이 빈번하고 부조리가 만연되고 있습니다. 과거 단순히 붓다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신앙하며 믿고 따르는 불자에서 변화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항시 깨어있도록 스스로를 일깨워야만 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실상의 본성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나와 마주한 상대의 경계를 사유해 봅시다. 나는 얼마나 너와 그리고 조직,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시대와 어울려 소통하고 있는가. 그러한 마음을 내어 실천함을 일컬어 사랑과 자비라고 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굳이 불교라고 하는 종교학적 사유의 배경을 배제하고도 이해가 가능한 공존의 가치 영역입니다. 인류의 공통된 행복을 실현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사성제를 근간으로 무자성의 축대를 올려 반야와 여래장의 지붕을 올리는 것, 이를 붓다의 삼전법륜이라고 합니다. 미묘한 실상을 바로 헤아리도록 중관에 해당하는 멸제로 말미암아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도제가 정광명을 발현하는 삼전법륜입니다. 무자성의 법을 통해 대상의 공을 바로 알아 주체의 식이 본래 명료해질 때 금강승에 입문하게 됩니다. 대상과 주체의 공함을 비로소 알아차리는 것, 이를 더불어 수행하게 되었을 때 금강저를 지닐 자량이 원만해 지며, 마침내 궁극의 무상 요가에 입문함을 허가 받게 됩니다. 이를 논함이 바로 보성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