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현담>의 <홍자권洪字卷>에는 ‘교체심천敎體深淺’이라는 과목이 등장한다. 그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 불교에는 수많은 경전들이 출현했고, 그 경전 속에 또 수많은 ‘가르침[敎 ..sana]’이 등장하는데, 이런 ‘가르침들의 본질[敎體]’ 또는 바탕이 무엇이고, 그것들 사이의 ‘깊음과 얕음’을 따져보겠다는 뜻이다.
하나의 경전 속에 복수의 ‘가르침[敎]’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지난 호에 말했다. 비유하자면, 요즈음 TV에 등장하는 하나의 드라마 속에 크고 작은 다양한 사안(사건)들이 등장하는 것과 같다. 물론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의 궁극적 의도 내지는 가르침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가르침이 지향하는 궁극적 의도를 교학敎學에서는 ‘종취宗趣’라는 전문용어로 표기한다. ‘종宗’이란, 해당하는 한 부파가 제일 원리로 숭상하는 명제(또는 주장)를 뜻한다. ‘종취론’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다루기로 한다.
2.
단도직입적으로 ‘가르침들의 본질[敎體]’ 문제로 돌입해 보자. 누가 무슨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경우, 그 메시지는 어디에 바탕해서 가능하냐는 것이다.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음성’이다. 나아가서는 그 음성을 기록한 ‘문서’이다. 그런데 이 ‘음성’이나 ‘문서’가 ‘메시지’ 자체는 아니다. 그것들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도구 내지는 수단에 불과하다.
‘음성’이나 ‘문서’는 그 속에 내재하는 일정한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물의 이름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는데, 교학에서는 이를 ‘명名’이라 명칭 붙인다. 또 문장도 있는데, 이를 교학에서는 ‘구句’라고 명칭 붙인다. 또 ‘명’과 ‘구’가 근거하는 음성의 굴곡이나 문자 개개의 음절이 있는데, 이를 교학에서는 ‘문文’이라고 하고, ‘문’이 두 개 이상 겹칠 때 이를 ‘신身’이라 한다. ‘명’, ‘구’, ‘문’에 대해 실재론자들은 ‘실유實有’라 주장하고, 유명론자들은 ‘가유假有’라 주장한다. 소승 쪽 설일체유부의 교학은 전자 쪽에 기울고, 대승 쪽 중관학파나 유식학파의 교학은 후자 쪽에 기운다.
3.
이 방면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좀 어려울 것이다. 출가자들 중에는 한 생각 탁- 놓아버리는 것이 불교이지. 한 마음 챙기면 되었지. 불경은 다 ‘밑 닦아낸 똥 쑤시개’라고 큰 소리 치는 사람도 있다. 무식하면 무슨 소릴 못하겠는가. 또 재가자들 중에는, 절을 찾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3천 배 절 올리고, 다라니 기도 열심히 하고, 조상천도 열심일 수 있다. 글쎄요. 그리하면 복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받을 복이라면 차라리 교회 다니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추구하는, 그 인물들이 부처가 되었건 보살이 되었건 출가자가 되었던, 그들의 수행은 그렇지 않았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부단히 일생 수행한다. 부처님이 남겨주신 ‘말씀[敎]’의 핵심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 점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혹세무민하는 종교가 아니라면 다 그렇다. 말씀이 중심이다. 특히 불교라는 종교는, 한편으로는 인간 이성과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이성과 사유에서 출발한다. 또 인간 이성과 사유를 분석하되 반드시 언어와 문자와 사유를 분석의 도구로 사용한다. 불교학은 문법학과 논리학이 수반된다. 불교의 역사에서 볼 때, 부파불교시절에는 (1) 가르침의 본질은 음성에 있다 생각하기도 했고, (2) 가르침의 본질은 ‘명’, ‘구’, ‘문’에 있다 생각하기도 했고, (3) 가르침의 본질은 이 둘 모두에 있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부파’를 비판하면서 등장하는 ‘대승’에서는 어떠한가? 화엄교학에서는 일곱 종으로 구별하여 이에 대답하고 있다. 편의상 번호를 연속해 붙여가기로 한다.
4.
이번 호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청량 국사와 규봉 선사의 설을 따른 것이다. 이 두 분은 경전을 사이에 두고 약 2년간 스승 제자로 같은 시공에서 사셨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핵심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청량께서는 당시 유행하던 ‘유상유식파’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화엄교학의 토대를 완성하셨고, 규봉께서는 이렇게 완성된 토대 위에 당시의 선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더 나아가 정토사상을 화엄교학의 범주 속으로 녹여들이신다.
청량의 『화엄경』 <현담>과 규봉의 『원각경』 <현담>을 바탕으로 대승에서는 ‘가르침’의 본질을 어떻게 체계화 하는지 이하에 기술한다. 종이에 쓰인 경전을 펴보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크게 두 방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방면은 이리 저리 얽혀진 ‘문장’이고, 다른 한 방면은 그 문장들이 전해주는 ‘의미’이다. 전자를 교학 용어로 ‘문文’이라 하고, 후자를 ‘의義’라 한다.
봉선사의 월운 스님께서 평소 학인들을 가르칠 때, “능전지문能詮之文, 소전지의所詮之義”라고 외우기 쉽게 말씀하신다. 결국은 <‘문文’-‘의義’>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가르침의 바탕’, 즉 ‘교체敎體’를 이루는 데, (4) ‘문文’은 소의所依가 되고, ‘의義’는 능의能依가 된다. 쉽게 말하면 ‘메시지[義]’는 ‘문文’이라는 매체에 의지해서[依]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역으로 말할 수도 있다. ‘문’이 ‘의’를 드러낸다고.
‘문文’에는 모두 6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명名’, 둘째는 ‘구句’, 셋째는 ‘자字’, 넷째는 ‘어語’, 다섯째는 ‘행상行相’, 여섯째는 ‘기청機請’이다. ‘기청’은 법문을 청하는 대중의 근기를 뜻한다. 이렇게 여섯 종류의 ‘문文’에 의지해서, 열 종류의 ‘메시지[義]’가 구성된다. 이것은 『유가사지론』의 설을 화엄교학에서 수용한 것인데, 이런 교학을 바탕으로 대승에서는 (4) ‘소전所詮’ 되는 ‘의義’ 모두가 ‘가르침’이다 한다. 
한편,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유마경』 「보살행품」에서 어느 국토에서는 ‘광명’이나 ‘먼지’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입능가경』 「집일체불법품」에서는 몸 동작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등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사례도 있다. 향적세계에서는 향반을 먹는 것으로 삼매를 드러내시고, 극락세계에서는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정념을 성취한다. 삼라만상에 도가 있다. 이것을 두고 (5)삼라만상 모두가 ‘가르침’이다 한다. 독자 여러분. 어떠세요? 말 되지 않습니까? 이게 불교입니다. 이렇게 ‘가르침[敎]’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그런 다음 그 가르침 따라 삶을 살아야, 그게 부처님의 제자이지요.
5.
계속해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이상을 규봉은 ‘수상문隨相門’이라고 분류한다. 감각기관에 의한 ‘표상表相’과 관련지어 ‘가르침’의 본질을 논하기 때문이다. 이하는 규봉의 용어로는 ‘유식문唯識門’에 해당하는데, 이기에도 부파에 따라 네 부류로 나누어진다. 전문적으로 공부할 사람은 『화엄경』이나 『원각경』의 <현담>(필자가 번역 출판한 책이 있다) 보시기를 권하고,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말하면, 위에서 말한 5종류의 매체들도 결국 인간의 의식 활동작용에 의존한다는 해석이다. 즉, (6) 우리의 ‘마음[心]’이 ‘가르침’의 본질이다 한다. 마음의 작용이 없으면 어떤 ‘가르침’도 성립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유식학파의 교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은 규봉의 용어로는 ‘귀성문歸性門’에 해당하는데, 의식의 본질 즉 ‘마음[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다. 위의 (6)에서는 ‘마음[心]’을 허망한 것으로 취급하는 반면, 다음에 볼 (7)에서는 청정한 것으로 규정한다. 양나라 때 번역된 『섭대승론』,  『금강삼매경』, 『호국인왕경』 등이 이 계통이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승류진여勝流眞如’도 이런 발상에서 나온 개념어이다. 이들은 (7) 진여眞如가 ‘가르침’의 본질이다 한다. 경전에 등장하는 일체 ‘가르침[敎]’의 본질은 진여라는 것이다. 진여를 문맥에 따라서는 ‘본각진심本覺眞心’ 또는 ‘원각圓覺’ 또는 ‘여래장如來藏’ 등으로도 표기한다.
6.
끝으로 이하는 규봉의 용어로는 ‘무애문無.門’에 해당한다. 이상에 말한 일체의 것들은 모두 연기현상으로 생겨난 것으로, 서로 겹겹으로 연관되어 있다. 당연 ‘진여[理]’와 ‘현상[事]’도 그런 연기현상으로 서로에게 상호 관계하고 있다. 부처님의 음성도 진여이고 그의 몸짓도 진여이듯이, (8) 진여와 현상의 상호작용하여 원융무애의 관점에서 ‘가르침’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한편, 일체의 현상(또는 사태)들은 각각 서로서로 관계를 맺으면서도 서로를 장애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취해야 ‘가르침’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즉 (9) 사사무애事事無.가 ‘가르침’의 본질이다 한다. 『화엄경』 「여래현상품」에서 “부처님께서 하나의 묘음妙音을 연설하시니 시방 국토에 두루 두루 들린다. 온갖 음音을 다 구족하셨으니 법우法雨가 다 두루 충만했다”고 하신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저 유명한 ‘십현문十玄門’의 교설이다. 십현문에 대해선 가을호쯤에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해인삼매 위에 모든 가르침이 드러나니, (10) 해인삼매가 ‘가르침’의 본질이다 한다. 거대하고 맑고 잔잔한 바다 표면에 수미산의 일체가 그림자 비치듯이, ‘삼매sam.dhi’가 ‘가르침’의 바탕이라는 발상이다. 불경에 많은 종류의 ‘삼매’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해인삼매야말로 ‘모든 삼매의 총체[總定]’인데, 바로 이 해인삼매가 ‘가르침’의 본바탕이라는 교리해석이다.
7.
한 경전 속에 무수한 ‘가르침[敎]’이 등장하는데, 그 가르침은 어디에 바탕을 두냐는 논의다. 이에 대해 교학에서는 역사적으로 등장한 수많은 경전들을 분석하여, 그 논의를 10가지로 정리했다. 결론적으로 ‘해인삼매’가 모든 ‘가르침’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해인삼매’에서 온갖 교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해인삼매에서 온갖 불법佛法이 설해진다는 결론이다. 불교의 보편성과 합리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소위 인간들의 ‘명상’에 가르침이 기초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실존의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