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 경열(海運敬悅, 1580~1646)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해운 경열(海運敬悅, 1580~1646) 스님은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 스님의 제자이다. 소요 스님은 청허 스님의 문도 1000여 명 가운데 종풍宗風을 총림叢林에 드날렸다고 당시 교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들(소요와 해운)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가짐이 마치 ‘상대의 훌륭한 점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게(見賢思齊견현사제)’ 한다.
이 말은 『논어』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말이다. 즉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기를 돌아보라(子曰자왈 見賢思齊焉견현사제언 見不賢而內自省也견불현이내자성야)’는 가르침과 같았으니 그의 소소한 기록은 비록 흩어지고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어찌 슬픈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두 분의 관계가 사제지간이 아닌 법우法友라고 할 정도로 돈독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소요 스님은 청허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고덕古德들을 두루 찾아 가르침을 청하다가 부휴 선수 대사(浮休善修, 1543~1615)를 뵈었는데, 부휴 대사가 소요를 훌륭한 인재로 여겨 대장경大藏經을 가르쳤다. 부휴는 조선시대 불교계의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불릴 만큼 『화엄경』과 대승경전에 조예가 깊어 그 제자가 700여 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해운 스님의 뛰어난 교학은 스승으로부터 이어진 것일 것이다.
소요 스님은 늘그막에 깨달음과 후학을 양성하는 덕을 성취하여 총림叢林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원근遠近에서 그를 숭모하여 귀의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스님들이 모여들어 그 숫자가 항상 수천을 헤아리니, 산문山門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같았다. 그는 정법正法의 눈으로 자비와 지혜를 운용하여 곧장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가르치니, 실로 중생을 건네줄 뗏목이며 법문의 동량이었다. 스님이 강당과 강단을 열고 불법佛法의 요체를 받들어 전한 제자가 6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 해운 경열 스님이라고 한다. 즉 소요 스님으로부터 “선종을 이은 자는 침굉 현변枕肱懸辯 스님이고, 교종을 전수 받은 자는 해운 경열 스님”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소요 스님이 1649년(인조 27) 겨울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입적하시자 해운 스님은 스승의 행장을 가지고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1589~1670)에게 비문을 적게 하였다.
우뚝한 기봉機鋒은 흐르는 별이요 폭죽爆竹이며
높은 기상은 돌이 갈라지고 벼랑이 무너지는 듯하네.
사람을 대함에 죽이고 살림은 군왕의 칼 같고
늠름한 위풍威風은 오호五湖에 가득하네.
소요 스님이 해운 스님에게 마음을 전하고 법을 전하면서 읊은 게송이다.
스님의 예리한 말이나 행동은 흐르는 별과 같이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았지만, 대중에게 각인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으며, 높은 기상 또한 우레와 같았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어서 “소요 대사의 문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지만, 오직 경열만이 그의 종통宗通을 이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그의 호를 해운이라고 한 듯하다. 해운이란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는 의미이고,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 간다는 의미는 유유히 소요逍遙함을 뜻하니 소요 대사의 전법傳法이 곧 해운이 아니겠는가”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운 스님의 행적을 알기에는 쉽지 않다. 다행히 『동사열전』에는 스님의 생몰년이라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보인다.
해운海運 선사가 세상을 떠난 지 지금 이미 169년이나 지났다. 그의 성씨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상고해 볼 만한 데가 없다. 다만 연파 혜장(蓮坡惠藏, 1772~1811) 스님이 일찍이 스님의 문중에서 옛 기록을 본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청련 원철靑蓮圓徹 대사가 대둔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을 적에 소요 태능逍遙太能 또한 대둔사에 왔다. 해운 경열海運敬悅은 이 해에 태능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으며, 67세에 입적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청련 대사가 법회를 연 해는 곧 만력萬曆 36년 정미(선조 40, 1607)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경열은 만력 8년 경진(선조 13, 1580)에 태어나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서 3년째 되는 병술년(인조 24, 1646)에 입적했다. 그가 태능 대사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을 때는 소요 대사의 나이 46세 때였고, 경열이 입적한 해는 소요 대사의 나이 85세 때였다. 소요 대사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경열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셈이다.
다산의 말을 정리하자면 해운 스님은 67세에 입적했는데, 스승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제자를 아꼈던 스승 소요 스님이 해운 스님을 위해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胷中法海幽難測 흉중법해유난측
篇內玄樞遠莫酬 편내현추원막수
가슴속 법의 바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 없고
시편詩篇의 현묘한 이치 너무 멀어 갚을 수 없네
또 이렇게 읊기도 했다.
禪綱敎骨誰能敵 선강교골수능적
華月夷風孰敢酬 화월이풍숙감수
선의 강요綱要와 교의 뼈 그 누가 대적하랴
중국의 달, 동이東夷의 바람 아무도 짝할 수 없네
시는 제자 해운 스님의 수행과 공부가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탁월함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미쳐 대적할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해운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들은 취여 삼우醉如三愚 스님이고 삼우의 법을 이은 제자는 화악 문신華岳文信 스님이다. 이와 같이 스님의 수행가풍은 제자들에 의해 면면히 전해졌다.
해운 스님의 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大翼南徙 대익남사
水擊三千 수격삼천
匪運昌遊 비운창유
是後是傳 시후시전
星飛竹爆 성비죽폭
光燭長天 광촉장천
六燃其燈 육연기등
遂至晶蓮 수지정련
붕새의 큰 날개 남쪽 바다 옮겨 갈 때
파도는 삼천리를 치고 난다.
해운이 아니면 뉘라서 저리 놀까?
이 뒤로도 그의 법 전해지되
흐르는 별, 폭죽처럼 터져서
드넓은 하늘에 광명이 찬란하네.
진리의 등불 여섯 번 켜지더니
마침내 정암과 연파에 이르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