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불교에서는 우리의 인생과 삶을 흔히‘생사(生死)’라고 부른다. 생사라는 말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인생에서 태어남과 죽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을 하고 돈을 벌고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살고 죽는’일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살고 죽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중대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생사일대사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실을 곱씹어보려 하지 않고, ‘죽음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해 있다’는 실존주의 철학자의 경고에도 귀기우리려 하지 않는다.
불교의 한 경전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우리의‘실존적 한계상황’을 충격적으로 깨우쳐준다.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를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그를 쫓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마른 우물 속에 간신히 몸을 피했다. 우물 곁 큰 등나무 뿌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데 바닥을 보니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 가느다란 나무뿌리에 매달려 우물벽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서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대며 노려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그가 위를 쳐다보니 자기가 매달려 있는 나무뿌리를 흰 죽는 일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면서 갉아먹고 있고, 먹이를 놓친 코끼리는 더욱 거칠게 성을 내고 있었다. 들판을 휩쓸어 오던 맹렬한 들불은 등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의 온몸을 쏘아댔다. 그런데 그때 나무에서 뭔가 떨어져 그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맛을 보니 달콤한 꿀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다섯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꿀을 받아먹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승광왕에게 설한 비유로서, 생사의 위험과 고통을 망각한 채 오욕락(五慾樂)을 좇는 미혹한 중생의 삶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을, 광야는 생사윤회의 무명(無明)의 긴 밤을,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생사를, 나무뿌리는 수명 또는 명줄을,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네 마리의 독사는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땅, 물, 불, 바람〔四大〕을,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세월〕을, 들불은 늙음과 병듦을, 벌은 그릇된 생각을, 다섯 방울의 꿀은 오욕락을 각각 의미한다고 부처님은 설명하신다.
《열반경》에 의하면, 죽음이란 험난한 길에 노자가 없는 것 같고, 갈 길은 먼데 길동무가 없고, 밤낮으로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길과 같다. 또한 어두운 길에 등불이 없고 들어갈 문은 없는데 집만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국 당나라 때 황벽 스님도 우리가 무명의 어둠을 철저히 깨뜨리지 못하면 죽을 때에 정신을 못 차릴 것이라고 하면서‘목마르기 전에 샘을 파라’고 경책한다.
평상시에 힘을 얻어 놓아야 급할 때 다소 힘을 덜 수 있는데,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죽음이 박두하면 이미 손발을 쓸 수가 없으니, 앞길이 망망하여 어지러이 갈팡질팡할 뿐이다. 평시에 구두선(口頭禪)만 익혀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해 제법 다 해 마친듯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평상시에 남들은 속여 왔지만 이때를 당해 어찌 자기마저 속일 수 있으랴. 권하노니, 육신이 건강할 동안에 이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라. 이 일은 풀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힘써 정진하려고는 하지 않고 어렵다고만 하니, 진정한 대장부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어느 여류 시인은 외출할 때에 꼭 속옷을 갈아입는다고 한다. 어느 스님은 외출하기 전에 메모지 같은 것도 다 불태워 버린다고 한다. 늘 죽음을 대비하는 깨어있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 한 행동이리라. 그렇다. 《사십이장경》의 말씀을 빌 것도 없이, 사람의 목숨은‘며칠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밥 먹는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호흡하는 사이’에 있는 것이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바로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바로 지금 맑고 향기로와야 하고, 바로 지금 자유로와야 하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정복할 수 없는 시간은 영원히 정복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즐길
수 없는 인생은 영원히 즐길 기회가 없다. 지금 현명한 생활을 보낼 수 없다면, 영원히 현명한 생활을 기대할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라고 한 데이빗 그레인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일야현자(一夜賢者)’의 게송은 더욱 구체적이다.
불교에서 현재에 충실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의 진실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음을 공포와 슬픔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이리라. 이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에 이른 깨달은 사람에게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는 드리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열반경》<성행품>에서 부처님은 가섭에게, “억센 폭우가 쏟아지면 약초와 나무와 숲이 다 꺾이고 말지만 금강석만은 깨뜨려지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죽음의 폭풍우도 모든 중생을 다 쓸어가지만 대승 열반의 경지에 있는 보살만은 해치
지 못한다. 저 금시조가 모든 용을 잡아먹지만 삼보에 귀의한 용은 먹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 이라는 금시조도 무수한 중생을 잡아가지만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선정(禪定)에 든 보살은 잡아갈 수 없다”라고 설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죽음에 대비해야 하지만, 주검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가장 바람직한 장례법으로 보며 화장에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바, 불교인들은 가능한한 가족들과 미리 상의하여 화장을 하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말엽에서 조선조 초엽에 활약했던 함허당(涵虛堂) 기화(己和)의《현정론(顯正論)》에는 화장을 비판하는 유가(儒家)의 입장과 화장을 옹호하는 기화의 주장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현정론》에 의하면, 당시 유생들 사이에“상사(喪事)는 인간사의 대사(大事)로서 부모가 죽으면 장지(葬地)를 잘 골라 후하게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에 열매가 많이 열리듯 자손으로 하여금 번성케 하기 위함인데, 불교도들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망령되이 화장법을 행하여 후사(後嗣)를 끊게 하고 있으니 어찌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비난이 있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함허당은“사람의 육체는 집과 같고 정신은 그 집의 주인과 같아서 집이 무너지면 주인이 머물 수 없듯이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떠나는 것인데, 사람들은 나무와 흙으로 지어지고 온갖 더러운 것으로 꾸민 집에 대해 애착을 갖기 때문에 그 집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고, 그리하여 집이 무너지더라도 홀연히 떠나지 못한다”라고 불교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화장으로 죽은 후에나마 이러한 미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할텐데 매장함으로써 망령된 생각을 그대로 보존케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한다. 또한 화장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러움을 버리고 깨끗한 데로 나아가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승천(昇天)케 하며, 극락왕생을 돕는 도(道)로서 훌륭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생각컨대, 매장하는 것은 효도이고 화장하는 것은 불효라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매장한다고 해서 그 시신이 썩지 않고 영원히 보존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얼마 안 가서 썩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부모의 시신이 썩어가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시신을 살아생전의 부모와 동일시하는 것이 효도라 한다면 이러한 불효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화장하는 것만이 효도라는 말은 아니다. 화장이나 매장이나 수장이나 임장은 어디까지나 장례의 한 방법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방법만을 가지고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례방법은 그때그때
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것을 택하면 그만인 것이고, 중요한 것은 오히려 시신에 대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함허당의 말 속에도 불교에서 화장을 하는 이유와 시신에 대한 불교적 마음 가짐의 일단이 표현되어 있지만, 《석문의범》의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통해 불교에 있어서 화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검을 처분하는 화장에 이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의 본능적 슬픔과 두려움이야 누군들 느끼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슬픔과 두려움은 진리의 빛에 의해 이렇게 승화되고 평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연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자연 을 초월할 수 있는 깨달음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적인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자연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은 불안과 고통을 극복할 수는 있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존 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바르게 깨달음으로써 가능하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생사일여(生死一如)’가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의 미혹은 생과 사, 생사와 열반을 서로 다르게 보는 것이다. 따라서 화장은 모든 미혹의 근저에 있는 무명의 티끌을 불사른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다비식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단순한 장례식이 아닌, 무언의 법을 설하는 법석(法席)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