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한 달이 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23 일 새벽 경남 김해 봉하마을 봉화산의 험준 한 절벽인 부엉이바위의 벼랑 끝에서 이렇게 한발을 내딛자 일각에선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과 조선·중앙·동아일보가 벼랑 끝에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고 하고, 혹자는 사실상 명예사형 선고가 내려진 그가 산송장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존엄사를 택했다고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느끼고 벼랑 끝에서 몸을 던졌다. 그가 그렇게 떠난 지 10일 뒤 그와 그의 가족들을 샅샅이 뒤지며 수사했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결국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실이 인정된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유유히 낭독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이미 세상에 없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며 검찰의 부도덕성을 질타했다. 며칠 전 옷을 벗은 임채진 검찰청장은 그나마 자신을 임명했던 대통령을 수사해야했던 괴로움의 일단을 내비치며 유감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직접 수사에 임했던 수사팀은‘죽은자’를 향해 채찍의 정당성만을 옹호함으로써 박연차 게이트 수사발표를 끝맺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뒤‘오직 죽은 권력을 향해서만 유독 독하고, 산 권력에 대해선 한 없이 굴종하는’검찰의 비겁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곳곳에 메아리쳐 검찰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듯 했지만 검찰은 벼랑 끝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벼랑 끝에 서서 한발을 더 내딛어라.”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선가(禪家)의 법어였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하면,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이라고 했다. 즉 천 길 낭떠러지에서 한 발을 내디디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도 벼랑 끝에서 한발을 떼는 순간 과연 선사들이 말 한대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을까. 선가에서‘백척간두진일보하라’는 것은 실제 몸을 던져 죽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끝까지 붙들고 놓아버리지 못하는‘나’를 버리라는 것이다. 말기 암에 걸려서라도 끝내 약물과 기계에라도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려고 몸부림 칠만큼 인간이 가장 놓지 못하고 애착하는 것이 우리의 몸뚱이인 것을 생각한다면 몸뚱이를 내던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결단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고인의 영혼 여행을 함께 할 수 없으니, 그에게 어떤 세상이 펼쳐졌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벼랑 끝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나락으로 떨어져만 가던‘노무현’의 명예는 회복되고, 그의 존엄성은 회생했다. 기적이었다.
만약 그가 벼랑 끝에서 한 발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그가‘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했듯이 그의 말대로‘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고 했던 대로 됐을지 모른다.
노 전 대통령이 절벽에 떨어진 날 봉하마을에 도착한 한 측근은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 보수언론 조·중·동을
거론하며“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냐”고 외쳤다.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대 역사의 비극의 중심에 독재권력과 우익언론의 왜곡이 자리하곤 했다. 따라서 권력구조 개편과 언론의 제자리 찾기는 간과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번에 특별히 주목할 것이라면 셋 가운데 단연 검찰이다. 권력을 뺏고 뺏기는 정치의 세계야 애초 비정하고, 여야란 공인된 적대적 관계다. 페어플레이와 탈 권위를 내세우는 노 전 대통령 같은 이가 바보로 치부되는 그런 곳이다. 언론 또한 미국처럼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밝혀야하는 시점이 아니냐는 논의가 나올 만큼 이미 자신의 정파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은 색깔이 다른 진영에 대해선 상대방이 권력자든 아니든 상관 없이 대립각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며 정년이 보장되는‘공무원’인 검찰은 다르며, 달라야 한다. 법(法)은 종교에선 진리(다르마)로 통한다. 진리란 진실한 것이다. 검찰은 사실조차 입증하기 어려워 비본질적인 명품시계 등의 얘기를 흘려 명예를 더럽히려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형평성을 잃
으면 이미 진리도 법도 아니다. 세속 법에선 매를 때린 행위만을 중요시하지만 진리의 법에선 그‘의도’ 가 더욱 더 중요하다. 즉 마음이다. 같은 매도 분노의 매가 있고, 사랑을 안은 눈물의 매가 있다. 같은 칼이라도 너와 나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칼은 고름을 빼고 암을 도려내고 혈을 뚫는 활인검이 되지만, 보신과 권력에 대한 아부와 치기의 마음으로 휘두른 칼이라면 그것은 살인검일 수밖에 없다. 칼도 같은 칼이 아니며, 법도 같은 법이 아니다. 문제는 칼이냐 법이냐의 사실이 아니라 그를 쓰는 마음의 자세다.
만약 검찰이 현재의 마음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정권 안보의 수문장이 되겠노라며 깊게 고개를 숙이다가 어느 날 태도를 돌변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안면을 몰수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 칼날을 겨눈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마음은 어떠할까. 복장이 터질 듯 분해 영일만 앞바다로 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 될 날이 없으리라고 과연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중세 암흑시대가 아니다. 21세기 시민사 회다. 하지만 최고의 두뇌들이 모였다는 검찰이 시민사회의 성숙도면에서 무뇌로 비춰진다면 그것은 검찰만의 불행이 아니다. 여러 분야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도더라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검찰의 행태는 용인받기 어렵다. 선출직인 대통령이야 5년 임기가 끝나면 끈 떨어진 연이 되고, 조·중·동의 기자도 기자를 그만두면 거의 할 것이 없다. 하지만 검사를 그만두더라도 변호사라는 최고의 자격증이 보장되는 검사들이 왜 그런 것일까.
‘두뇌’들이 멸시한‘바보’는 백척간두에서 한발을 내딛었다. 세상엔 죽어도 사는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 과연 우리의 백척간두에 서서 ‘살아도 죽은 비굴한 삶’을 박차고 자신을 던져 새로운 검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이가 정녕 없는 것 일까. 선사의 할이 들려오지 않은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