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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희망의 씨앗으로 가꾸는 불교가 되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에 사찰을 찾은 많은 불자들을 보면서 야단법석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따스한 기운이 저절로 확산되어진다’는 평범한 가르침이 잔칫날처럼 느껴집니다.
또 영국의 철학자 나이절 워버턴의 《철학자와 철학하다》에 있는, ‘꽃나무를 생각해보자. 만약 여러분이 물을 주고 빛을 충분히 비춰주고 영양분을 공급하면 잘 자라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 방치하거나 벌레들이 잎을 갉아먹게 하거나 말라붙도록 내버려둔다면 시들고 말 것이다. 사람들도 꽃나무와 마찬가지로 물을 주고 빛을 비춰줘야 잘 자랄 수 있다.’는 글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 전, 경찰대학에 가서 고위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신적 노동자입니까? 육체적 노동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육체적 노동자”라고 대답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그런 여러분들에게 공무원 중에서도 ‘민중(民衆)의 지팡이’라 불리며 고생하시는 경찰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이 사회(社會)는 유난스럽게 내몰아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인과법(因果法)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일제 식민지 시절 ‘순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경찰이라는 이름 속에 덧씌워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게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요즘, 우리 불교가 사회로부터 지탄받으며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찬연한 불교문화의 혜택을 입었던 우리들이 조선의 오백년,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시달림을 당하며 오늘에 이르도록 정치적인 여러 가지 현상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될 것이며, 그러면서도 세상이 유난히 사회적인 관심으로 불교를 향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지구촌에는 여러 형태의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종교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말하고 자비와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과 같은 종교로 일어난 분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어렵고 힘든 세월 속에 노출 되어있는 역사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세상은 잊혀진 역사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도 아랍권 국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가 명(命)이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폭탄테러에 의해서 죽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中心)에는 종교(宗敎)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일처럼 긴 시간 다각도로 언론보도는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涅槃經)》에서 보살(菩薩)과 나쁜 비구(比丘)의 차이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보살은 진실한 이치를 이해하고 글자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이 경(經)의 이치를 사람들에게 해설하여 주지만, 나쁜 비구들은 부처가 열반(涅槃)한 뒤에 이 경의 참뜻이 세상에 퍼지지 못하게 하려고 ‘소치는 여인이 우유에 물을 많이 타서 팔아먹는 것’과 같이 경의 문구들을 왜곡 하거나 날조하여 내돌림으로써 불도(佛道)를 말살하려할 것이다.』


불교에는 ‘증상만(增上慢)’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말은 최상의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은 것처럼 교만하게 우쭐대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가장 크게 우려(憂慮) 하셨습니다.
도를 이루지 못한 이가 도를 이루었다고, 도를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았다고, 깨끗하지 못한 이가 깨끗하다고, 잘나지도 못한 이가 잘났다고 …,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드러냅니다.
요즘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아도취(自我陶醉), 자아상실(自我喪失), 자아망각(自我忘却)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는 이것을 사회적 언어로는 ‘도덕 불감증(道德 不感症), ‘도덕 해이증(道德 解弛症)’이라고 말합니다. 또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사이코패스’의 또다른 이름인 ‘소시오패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매몰 되어있는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정신노동자 20명 중에 1명 정도가 이 병(病)에 노출되어 있다는 통계자료도 있습니다.
소시오패스가 되는 데는 유전적인 요인과 유년기 시절에 학습한 경험으로 인한 훈습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역사적인 인물로는 히틀러와 스탈린 등이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고, 최근의 인물로는 빈 라덴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중상모략(中傷謀略)과 시기질투(猜忌嫉妬)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불교적 시각에서는,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공동체(僧伽共同醴)는 부처님 법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多幸)한 일인가 생각해 봅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으로 기계문명의 발달이 아닌, 서양에 불교가 뿌리 내리고 꽃피워지고 열매 맺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조심스럽긴 하지만,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세상을 다 망가트려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 허다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상실병(自我喪失病), 자아망각병(自我忘却病), 자아도취병(自我陶醉病)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부처님법과 조사어록(祖師語錄)과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흔들어 깨우든, 초인종을 눌러 깨우든, 깨우자는 것입니다. 죽비를 들어 정신 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을 깨우게 하는 진정한 모습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질투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험에 직면해서 두려워말고 이익을 위해서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를 부려 만용하지 말며 허약하다고 비겁하지 말며 지혜롭게 중도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모습이다.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 여기나니, 나약함을 버려 중도를 지켜라.』


증상만자들처럼, 소시오패스병에 걸렸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러한 병에 걸린 줄도 모르는 그들을 생각하며 우리 불자들은 각자 자신의 모습에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직지사 조실이셨던 관응(觀應) 대종사님은 “부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창조주 범신(創造主 梵神)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누가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연법(因緣法)에 의해서 연기(緣起)되어지는 이치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우리들에게 보이신 것이며, 창조주가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연기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본생경(本生經)》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친지의 죽음은 곧 우리들 자신 한 부분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보다 엄숙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한두 차례 시행착오가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잘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과 직결된다.』


모든 인간은 부모님으로부터 일정 부분을 빌려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따라서 가족 중에 세상을 먼저 떠나는 이는 곧, 나 자신 한 부분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라 하였습니다.
꼭 죽어야 죽음을 보고, 늙어야 늙음을 보고, 병들어야 병들었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병듦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고도 노병사(老病死)를 볼 수 있는 이치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보다 더 엄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생(生)에 대한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대충 살지 말고 짬지게 살아야 합니다. 건성으로 살지 말고 진지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각자의 인생사에서 한 두 차례 시행착오는 용납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잘못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 어떻게 잘 갈무리 할 것인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을 잘 살아간다면 뱀이 허물을 벗듯이 끝맺음을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완전한 사람,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끝이 없는 혈투장의 모습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결승점은 점점 그림자 좆는 인생처럼 더 멀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빛과 그림자의 함수 관계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도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채워줄 수도 있는 삶이, 늘 우리와 함께하는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잘못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이에게는 용서를 해야 합니다. 잘못한 허물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 허물을 드러내고 참회하는 이에게는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불자의 참모습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여름안거철에 일념(一念)으로 참선하실 분은 참선하고, 염불하실 분은 염불하며, 함께 정진하는 임진년 하안거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