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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쇄신법안 마련에 거는 기대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동양 사상의 정수로 꼽히는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서나 선현들의 주해서를 보다 보면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공부가 깊은 분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겠지만, 한문으로 기록된 원서의 내용이 은밀한 비결(秘訣)처럼 워낙 압축적이어서 해석의 여지가 터무니없이 넓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가령 노자의 도덕경 제1장의 저 유명한 구절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묘(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도 제겐 그러했습니다. 해설서를 보면 “도가 말로 표현(한정)될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아울러 가리킨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해설을 본 뒤에도 그 의미를 곧장 이해하기 힘들었고, 훗날 다른 상대적으로 쉬운 도덕경의 다른 구문들을 통해, 또 다른 이들의 더 평이한 해석을 참조해, 편의적으로 이해한 듯합니다. 저의 이해가 옳은지 그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짧고 힘찬 글은 그 다의성과 함축성으로 하여 신비로운 깊이를 지닙니다. 어떤 글들은 시적 아름다움을 지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공부가 얕은 이에게는 야속하게 여겨지기도 해서, 큰 스님의 알쏭달쏭한 화두처럼 야릇한 반발심이 들기도 합니다.
또 제자나 후학들이 기억을 더듬어 집성한 고전의 경우 판본마다 글의 순서가 다른 경우도 있고, 어떤 구문은 진위 논란을 빚는 예도 있습니다. 종교 경전 중에도 그런 예가 있는 듯합니다. 도마복음서처럼 기독교의 어떤 복음서는 한때는 각광받았으나 언젠가부터 전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성경에 수록되지 않고 경외(經外)복음서로 내쳐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대한 하나의 체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은 가지의 해석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기도 하고, 이단 시비를 빚기도 하고, 역사추리소설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개마고원)라는 책을 읽으며 저는 이 책이, 제가 막연히 느껴왔으나 용기 있게 질문하지 못했던 한국 불교에 대한 다양한 의문과 불만을 대신해서 질문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초심자가 불교에 입문한 뒤 읽고 듣고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들-궁금증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기억나는 대로 대충 옮기자면 그 처음이 ‘경전이 도대체 몇 개냐’입니다. 경전과 경전 아닌 것의 경계도 불분명하고, 안내서마다 소개하는 책이 조금씩 다르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불교의 삶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라는 혐의입니다. 한국불교가 과연 대승불교냐는 반문도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너무 어렵고, 또 경전의 어떤 말씀은 다른 말씀과 맞서는 듯 보일 때도 있다는 지적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가령 한 큰 스님의 <법화경>과 <임제록> 강의에서는 ‘사람 모두가 부처’라고 해놓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염불이니 참선이니 1000배니 하는 것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부처가 된 사람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리송하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설명에 대해 모르겠다고 하면 ‘네가 근기(수준)가 낮아서 그렇다. 차원 높은 것은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서 저자는 “차원 낮은 99.9%의 사람들은 그 차원 높은 선불교와 일부 대승불교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말 아닌가? 이 얼마나 엘리트적인 교만 또는 불친절인가?”라고 대듭니다.
책의 행간에서 엿보이는 바, 정치학자인 그 분의 불교 공부는 스스로는 초심자라 칭했지만 저 같은 생 초보가 보기에는 아주 많은 공부를 하신 듯 보였습니다. 위에서 예를 든 저 질문의 해답 역시 저자가 정말 모르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만 낮은 수준에서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 높은 수준에서 조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조화를 공부가 얕은 이들도 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투는 가끔 격앙되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세계에서는 그대로 다 통한다고 한다. 아, 너무 편리하다. 물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도둑놈도 논리의 모순도 다 포용하는 것이 부처님의 세계이겠다. 아니, 틀렸다. 모순을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것도 부처님의 세계다. 아, 정신없다. 이런 논리라면 사실 아무 논리도 없는 것이고, 하고 싶은 대로 아무 소리나 지껄여도 다 옳고 그것이 다 부처님의 세계가 된다. 그러면 도대체 불교는 왜 있고 석가모니는 왜 태어났나? 임제 스님이 그랬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고. 젠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책에는 한국 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따짐이나 ‘고(苦)’의 의미, 무상과 무아가 허무주의와 어떻게 결별하는지에 대한 저자 나름의 이해도 담겨 있습니다. ‘공(空)’과 중도, 깨달음과 구제에 대한 해석 등은 스님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독자들에게 건네는 저자 나름의 겸손한 법문이기도 합니다.
집착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모든 집착을 배척하는 것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살기 위해 자고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심처럼 고귀한 욕심과 집착이 있고 반대로 나쁜 집착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좋은 집착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칠 경우, 그래서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저버리는 경우에는 긍정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해석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말씀 한 자락을 예로 듭니다. 
“내 말은 길잡이에 불과하다. 길을 찾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강을 다 건넜으면 타고 간 뗏목은 두고 가야 한다.”
아무리 고귀한 가치라도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또 다른 독단을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수타니파타》의 ‘시의 장’에 이런 말도 있다고 합니다.
“계율만을 너무 고집하지 말라.”
“순수를 바라지도 말고 순수하지 않음을 바라지도 말고 그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말고 가거라.”
“평화만을, 평화만을 너무 강조하지도 말라.”
저자는 저 모든 의문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가치를 사회적, 개인적 차원에서 적극 옹호하고 긍정합니다. 탐욕을 경계하는 무소유의 가르침, 조화를 추구하는 중도의 가르침, 고통을 이기고 공생을 도모하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불교를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저자 나름의 불교를 통한 개인적 행복의 비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여러 이웃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어정쩡하게 이끌려 다니는 얼치기 신자들에게는 ‘불교 입문’ 교리 강의보다 더 나은 안내서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스님들이 이 책을 읽으셨으면 합니다. 저자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모두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화석화한 교리해석과 불립문자에 머물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불교의 참 모습 참 가치를 중생들에게 알렸으면 합니다.
조계종 총무원은 최근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의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해 사찰운영위원회법과 예산 회계 선거 등 관련 쇄신법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모두 필요한 조치일 터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쇄신의 길이 거기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