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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들의 대화 방법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한국선학회 회장


1.
우리들이 선어록을 읽거나 선사 스님들의 말씀을 듣다보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거나 또는 앞뒤 모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옛날 책을 인용하시면서 이야기를 하시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번 호에서는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선학禪學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몇 마디 거들고자 한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거든다는 것이 오히려 독자님들의 머리만 더 복잡해지게 만드는 꼴이 될까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거드는 내용 역시 또 하나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하고는 되는 일이 없다. 공부를 해야만, 적은 수고로 정확하게 사안을 이해하고,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2.
선사 스님들은 무슨 말씀을 하실 때에는 왜 옛날 책을 인용하시는가? 이 문제를 먼저 설명하기로 한다. 요점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주장하면, 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해야 한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어떻게 판별하는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필 것이다. 예를 들어 언제나 나를 위하고 나에게 진실만을 말해주던 가까운 사람이 하는 주장이면, 일단은 그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그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믿을만한 사람’인가를 따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위에서 필자는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불자佛子들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은 누구일까? 첫째는 부처님이고 둘째는 스님이다.
3.
첫째 부처님을 살펴보자.
화신化身 석가모니부처님은 열반에 드셔서 지금은 안 계신다.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러면 열반에도 안 드시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불생불멸의 부처님이 계신가? 계신다. 어떤 부처님이 그런 분인가? 법신法身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이 그런 분이시다.
대승의 불자佛子들은 그 부처님께 귀의하고 신행생활을 한다. 부처님께는 공양을 올리는데,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사시에 불공’을 올린다. 이때 공양을 올리면서 부처님을 ‘가영歌詠’으로 찬송하는 이런 염불을 들으셨을 것이다.
불신보변시방중 삼세여래일체동
佛身普徧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
이 내용을 한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몸은 시방 세계에 두루하신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그러하시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은 법신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이시다. 법신 부처님께서 기왕에 하신 말씀을 글자로 적은 것이 세상에 유통하는 대승경전이다. 그 대표적인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승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법신 부처님은 현재에도 설법을 하고 계신다. 『화엄경 약찬게』의 “근본화엄전법륜, 해인삼매세력고”가 바로 그런 도리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해인삼매의 힘이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서, 근본이 되는 화엄의 법륜을 굴리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해인삼매’에 들어가면 법신을 친견하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삼매三昧’에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셋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간경看經이고, 둘째는 참선參禪이고, 셋째는 염불念佛이다. 이 셋의 우열은 없다. 사람마다 자신의 근기에 따라 하나를, 또는 둘을, 또는 셋을, 또는 이것저것 섞어가면서 수행을 하면 삼매를 체험할 수 있다. 삼매를 체험하면 그 힘으로 법신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
선어록이나 선사 스님들이 대승경전을 인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말씀이 진리이니, 그 말씀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점을 서로 확인해두어야 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대승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성립된다는 점이다. 대승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이상의 이야기는 모두 공허한 이야기로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안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문제이다. 대승은 믿을만한 것임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큰스님들은 온갖 노력을 하셨다. 그 대표적인 큰스님이 인도의 마명馬鳴 스님이시다. 그 노력의 산물이 바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 마명 스님께서는 대승은 믿을만한 근거가 있음을 각종 경전과 논리를 구사하여 이 책을 쓰셨다. 또 인도의 무착 스님은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으셨다.
문제는 이런 책들의 내용이 비전문가들에게는 너무도 어렵다. 방법은 둘 중의 하나이다. 첫째는 대승을 그냥 믿고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위의 책을 읽어서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 출가불자나 재가불자들은 위의 두 방법을 적절하게 혼용하여 신행생활을 해야 한다.
4.
둘째 스님을 살펴보자.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그 말씀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믿을만한 스님의 말씀이어야 그 말씀이 옳다. 그러면 어떤 스님의 말씀이 옳은가? 조사祖師 스님의 말씀이 옳다고 선종禪宗에서는 믿어왔다. 바로 이런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모은 책으로 한국에서는 예부터 『전등록』과 『선문염송』을 꼽고 있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이 법문을 하실 때에는 위의 두 책에 나오는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한다.
『전등록』과 『선문염송』에 등장하는 스님들은 위에서 말한 ‘삼매’를 체험하신 분들이다. 그러고 보면 『화엄경』도 ‘삼매’의 힘, ‘삼매’ 중에서도 ‘해인삼매’의 힘을 체험한 내용이다. 그러니 ‘삼매’ 체험이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불자라면, 출가불자이던 재가불자이던 저마다 ‘삼매’ 체험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체험한 ‘삼매’가 제대로 된 ‘삼매’ 체험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것을 판별하기 위해 ‘선종禪宗’에서는 『전등록』과 『선문염송』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고, ‘교종敎宗’에서는 『화엄경』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조선시대에 ‘선종禪宗’에서는 『전등록』과 『선문염송』으로 승과僧科 시험문제를 출제했고, ‘교종敎宗’에서는 『화엄경』으로 승과 시험을 보았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소위 ‘큰스님’의 대열에 들어갔다.
선사 스님들의 법문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전등록』과 『선문염송』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다행하게도 위의 두 책은 운악산 봉선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한글대장경’ 번역 불사를 완수하신 월운 스님께서 한글로 번역을 해놓으셨다. 『화엄경』은 세 종류가 있는데, 이 모두를 월운 스님의 사부님이신 고故 운허 스님께서 번역해 놓으셨다.  
5.
끝으로 『전등록』과 『선문염송』에 등장하는 선사들의 ‘대화 방법’을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선사들의 ‘대화 방법’에 대해서는 일찍이 조선시대의 백파白坡 큰스님께서 『선문수경禪文手鏡』이라는 책에서 분류해놓으셨는데, 필자가 한글로 번역 출판했다. 이 책에서 백파 스님께서는 임제의 ‘3구句’에서 제시된 의미의 행상을 ‘좌표’로 삼아, ‘본분本分’과 ‘신훈新熏’, 그리고 ‘수연隨緣’과 ‘불변不變’, 그리고 ‘진공眞空’과 ‘묘유妙有’, 그리고 ‘대기大機’와 ‘대용大用’, 그리고 ‘가리사家裏事’와 ‘도중사途中事’, 그리고 ‘죽임(殺)’과 ‘살려줌(活)’, 그리고 ‘긴 세월(古)’과 ‘이 순간(今)’, 그리고 ‘최초구最初句’와 ‘말후구末後句’ 등을 짝지어서 선사 스님들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계신다.
이번 호에는 ‘본분本分’과 ‘신훈新熏’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머지는 다음 호에 소개할 예정이다.
먼저 ‘본문’과 ‘신훈’의 말뜻을 설명하기로 하겠다. ‘본분’은 ‘선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본래 간직된 몫’ 또는 ‘천부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몫’이라는 뜻이다. ‘신훈’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이라는 뜻이다. ‘본분’은 변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신훈’은 인연과 상황에 따라 변질된다. 모든 사람에게 간직된 ‘불성’은 보편적이고 평등하지만, 사람마다의 ‘번뇌’는 다양하고 변한다.
선사 스님께서 법문 중에, “그대가 바로 깨달은 부처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 이는 ‘본분’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대가 본래 깨쳤다(悟)는 말만 믿고, 자신의 번뇌를 닦아(修) 없애지 않으면 큰일 난다. 한편 법문 중에, “번뇌를 닦으시오.” 또는 “보살행을 하시오.”라고 말씀하시면, 이는 ‘신훈’의 측면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음
(悟)’이란 수행 즉 ‘닦음(修)’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 또한 큰일이다.
자. 독자 여러분!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닦아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