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연
시인
살다 보면 우연한 일이 실수가 되고, 실수가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긴다. 그것은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결과이므로 충분히 숙고하여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결과는 만약 만족도가 높지 않아도 후회는 적을 수 있다. 그래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에서 뇌를 통째로 흔들어 놓는 고통을 만날 때가 있다. 고통을 건너가는 시간이 따로 있을까? 아니, 슬픔을 건너가는 길에 색다른 방향이 있을까?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세상 돌아가는 모습엔 내가 끼여 있다. 그 회오리 속에서 여여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마음 문을 닫으려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마음 문을 제대로 여는 방향에서 길을 찾는 게 훗날 스스로에게 덜 후회스러울 수 있다고 본다. 누구나 늘 행복할 순 없고 누구에게나 상처, 아픔, 고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흔적은 사실 열심히 산다는 표시이며, 깨달아가는 과정의 자취이며, 그 속에서 얻는 기쁨의 가치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픔에서 건져내는 깨달음은 ‘앓이의 사리’이니 삶에서 얻는 보석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여름을 선언하듯 빗물이 지나간 시간, 강화도 전등사에는 솔향이 흙내음과 버무려져 법당에 피운 향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이 향기를 자연이 주는 선물처럼 몸으로 받는다. 겨울내내 다 털지 못한 상처가 봄에 끝내 터져 아름답고 싶었던 시간을 얼룩지게 했다면 여름엔 수행자들이 안거에 들어가는 것처럼 맑은 푸름을 마시고 스스로 푸름에 빠져 볼 필요가 있다. 짙은 그늘마저 청청하게 느껴지는 숲도 좋고,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푸른 하늘을 쳐다볼 자리도 좋다. 저마다의 표정으로 피고 지는 꽃들이 있는 곳에서 꽃처럼 미소 한 번 지어본다면 더욱 좋다. 그곳엔 서로를 시샘하거나 헐뜯거나 상처 내는 모습이 없다. 그저 말없이 푸른 향기를 내고, 한껏 자신의 일을 하며 둘레에 묵묵히 작은 의미가 되어 주고 있다. 그 가운데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상처 몇 개쯤 끼고 사는 게 대수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상처, 뭐 그게 그리 중요한가. 그냥 숨 쉬고 살기 때문에 존재하는 껍질일 뿐인 것을.
스쳐온 바람만큼 사연이 권태로워
추스를 인연 찾아 전등사에 올라가니
고아한 풍경 소리에 내려앉는 내 껍질
덮어온 허물만큼 꿈에 속아 살았거늘
뭘 이제 숨기겠나 다 털면 그만 인걸
전등사 풍경소리 마시고 이제라도 방하착
-‘전등사 풍경소리에’ 전문-
전등사 대웅전 추녀에는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겼건만 다른 남자와 함께 행방을 감추자 그 울분으로 여자의 나체를 목각으로 만들어 법당 추녀를 들고 있게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마끝 풍경은 ‘어찌 그런 배반녀만 개과천선해야 하겠는가.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본보기로 여겨야 할 것이다.’며 법문하는 듯 울린다.
열매가 맺지 않는 은행나무는 또 어떤가. 전등사 도량에는 350여 년이라는 노령의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에는 백성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고 욕심의 불꽃만 태우는 원님의 고약함 때문에 스님들이 이 은행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게 부처님께 기도했다는 애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예가 어찌 옛날 원님의 심보만 있겠는가. 지금도 아집과 욕망에 죄의식없이 타인을 이용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새들의 쉼터만 되어 주는 은행나무와 추녀를 힘겹게 바치고 있는 알몸의 여인을 보면서 어쩌면 마음 공부의 텍스트는 ‘고통’이요, 부처를 발견할 세상도 ‘고통’이요, 자연의 이치에 눈을 뜨게 하는 것도 ‘고통’이란 생각을 한다. 고통이 없다면 누가 마음공부를 하며, 스스로 부처를 찾고, 자연을 돌아볼까. 그러므로 고통을 주는 이가 있다면, 아니, 고통을 받았다면 그 안에서 마음을 찾고, 부처를 발견하고, 자연의 이치에 눈을 뜰 때 오히려 큰 소득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풍경이 전해주는 법문 한 자락 들으며, <죽림다원>으로 향했다. 전등사에 와서 들려 보지 않을 수 없는 명소가 된 산사찻집 <죽림다원>은 외부 뜰부터 내부까지 어디 한 곳도 소홀함 없이 다원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눈 밝은 사람들은 다원 입구부터 작은 도자기에 한 송이씩 꽂힌 꽃을 보면서 가슴을 열게 된다. 가슴이 열린 채 문지방을 건너면 마치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아기자기 놓여 있는 크고 작은 소품들을 보면서 눈이 빛나게 된다. 다 둘러본 후 차를 한 잔 주문하고, 문 하나를 더 들어가면 바깥풍경을 그대로 창 안으로 들여온 환한 공간이 나온다. 밝은 천장을 조명처럼 두르고 있는 천연염색천이 아늑함과 부드러움을 주고, 바깥의 푸른 풍경이 그 분위기에 조화를 이루어 감로수 한 잔 마신 듯한 청량감을 준다. 그 풍경에 거슬림없이 탁자마다 작은 꽃들이 마치 무늬처럼 놓여 있다. 살면서 이런 꽃무늬를 가슴에 새겨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꽃무늬 그려가며 인연 따라 사는 거다
사는 뜻 별 다를까 마음 이치 유별할까
여름도 차 한 잔 마신 듯 지나가는 길인걸
 
한줄기 비로 맑아진 여름, 잠시 마음 자락에 푸른 바람 같은 시간이 필요한 날 나무같은 분과 마주 앉아 시원한 솔차와 오미자 차 한 잔씩 나누었다. 여름 산사카페에서 가장 갈증을 빨리 해소할 수 있는 향기로운 음료다. 갈증은 몸에 쌓인 피로로 뭔가가 필요하다는 표시고, 마음의 갈증은 욕심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는 표시다. 욕심이 없으면 서두를 것도, 바라고 기다릴 것도 배신도 없다. 욕심이 없다면 갈증도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인생 선배인 문우와 차 한 잔 나누는 사이, 안개 같던 문제들이 투명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생각만 머리에 가득할 땐 스스로 숨 쉴 수 없는 갑갑함을 느낄 수 있다. 번뇌에 점거된 가슴은 소리없이 홀로 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냥 고요한 가운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맑은 바람을 쐴 필요가 있다.
허업虛業에 속는 것은 욕심의 착각이다
소리 없이 울지 말고 스스로를 묶지 말라          
저 맑은 바람 드나들게 마음 끝을 열어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