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 약탄(影海若坦, 1668~1754)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스님의 휘諱는 약탄若坦이고 자는 수눌守訥이며 호는 영해影海이고 속성은 광산 김金씨이다. 아버지 이름은 중생中生이고, 전라남도 고흥高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서徐씨는 꿈에 범승梵僧을 보고 난 뒤에 임신을 하여 1668년(현종 9) 10월 1일에 스님을 낳았는데, 몸에 포태를 달고 나왔다.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호탕하여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8세 때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배운 것은 반드시 외웠다. 10세 때에는 고흥高興 능가사楞伽寺의 득우 장로得牛長老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지만, 17세 때 처음 조계산 송광사에서 무용당 화상無用堂和尙을 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새에 눈물을 흘렸다. 무용 수연 스님은 영해 약탄影海若坦과 두륜 청성頭輪淸性 등 모두 22명의 제자를 두었다.
소승 약탄若坦은 일찍부터 선사의 문지방을 드나들며 자주 귀한 말씀을 듣고 이 도道에 들어올 줄을 안 자이니, 어느 것 하나도 선사께서 귀를 끌어당겨 일러 주시고 손바닥을 가리켜 보여 주신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 은혜는 천지와 같았고, 그 정은 골육보다도 더하였으니, 은정恩情이 그러하다면 비록 금수라도 목숨을 바쳐서 그 덕에 보답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눈물을 훔치고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은 자료를 모아 간행하려 하면서 삼가 이 행장을 쓰는 바이다.
1724년(영조 원년) 영해 스님이 쓴 스승 무용스님의 행장 가운데 일부분이다.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우쳐 준 스승의 은혜가 천지와 같았고, 그 정은 골육骨肉보다 더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18세 때 구족계를 받았고, 22세 때 경법經法을 배웠는데 아무도 스님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28세 때에는 ‘만법유심萬法唯’心의 종지를 더욱더 믿고 자성自性을 밝히기 위해 용맹정진했는데, 납자衲子들이 진심으로 귀의하였다. 37세 때인 1694년(숙종 20)에는 봉산鳳山의 초청을 받아 처음 자수암慈受菴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명성이 멀리 퍼졌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온 대중이 100명을 넘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선사가 이룩한 결과였다.
스님은 52세 때인 1719년(숙종 45)에는 송광사에서 스승인 무용 수연 스님을 위해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시설施設했는데, 당시 사방에서 천 명 이상의 대중이 줄지어 모여들었다. 그해 여름에 무용당 화상이 입적하였다. 선사가 다비를 하여 묘지에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이것은 곧 선사가 모범으로 삼은 것이었다. 1722년(경종 2) 여름에 왕의 명을 받들어 국사의 탑을 송광사에 모시고, 이듬해인 1723년(경종 3)에는 무용당문집無用堂文集을 간행하였다. 문집은 권 1책으로 서문 중 4면과 본문 중 서書 부분 12면이 필사로 보완되어 있다. 무용당유고無用堂遺稿라고도 하며, 제자들이 글을 모아 1724년(경종 4)에 간행하였다. 권두에는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권상에 시 65수, 권하에 서書 10수, 서序 4수, 모연문募緣文 6수, 상량문上樑文 1수, 기記 3수, 발跋 5수, 계啓 3수, 제문祭文 3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무용 스님은 문집의 「상강남부백계上江南府伯啓」에서 공자孔子와 석가釋迦·양자楊子·묵자墨子의 도가 상반되는 것 같지만, 실은 모두가 일심一心이라고 지적하고, 서로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해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序 중 「심경소기회편서心經疏記會編序」는 반야심경의 진리를 극찬한 책이라는 것을 표방한 글이고, 「중간선문염송설화서重刊禪門拈頌說話序」는 향산사香山寺에서 선문염송을 간행하게 된 과정과 선문염송의 유래 및 내용의 개요 등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스승 무용 스님의 삼교일치 사상은 영해 스님에게 전해졌고, 제접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일심一心의 살아있는 가르침을 전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스님은 61세인 1728년(영조 4)에 수백 명의 납자를 거느리고 방장산의 벽송사로 옮겨 주석하였다. 스님은 마침 그 지역에서 난亂이 일어나 백성들이 불안해하자 대중들에게 “임금의 국토가 이와 같은 변란을 맞이하였는데도 어찌 방책만 세우고 있을 것인가?” 그러고는 이에 대중을 흩어 버리고 난중亂中으로 달려가서 끝내 승리를 보았다. 이것은 곧 스님의 우국충정이었다.
난은 1723년(영조 4) 4월 3일 소론과 남인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을 가리킨다. 경기·충청도의 이인좌李麟佐, 경남의 정희량鄭希亮과 조성좌曺聖佐,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평안도의 이사성李思成, 함경도의 권익관權益寬, 중앙의 남태징南泰徵 등이 주동하여 영조 즉위 후 노론老論이 정국을 장악해 가기 시작했고, 반면에 소론少論의 입지는 약화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소론 강경파와 숙종 연간 정계에서 배제된 남인 중 강경파 일부가 연합하여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李麟佐의 난’, 또는 ‘정희량鄭希亮의 난’이라고도 한다. 주동자 정희량은 영주 지역에 연고가 있던 인물이지만,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영주 지역 사림들은 무신난을 진압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스님은 81세 때인 1748년(영조 24)에는 고흥 팔영산八影山에 있는 능가사楞伽寺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사적비는 절의 투명透明 스님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오수채吳遂采에게 부탁하여 1690년(숙종 16)에 건립하였는데, 그 비碑의 음기陰記를 스님이 찬술한 것이다. 절의 사적기는 능가사의 역사와 조선 불교의 역사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승가의 동향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어 소중하다. 82세 때는 제자 풍암 등의 청을 받아들여 ‘잡화엄대법회雜華嚴大法會’를 열었는데, 천여 명의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곧 스님의 중생 구제였다.
아무리 고귀한 부처님의 바른 법을 깨우쳤다고 하더라도 아래로 중생교화를 소홀히 하거나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도는 깨닫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다. 용맹정진한 끝에 얻어낸 깨달음을 대중들을 위해 회향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자세요, 도리인 것이다.
스님은 87세 되던 1854년(영조 30) 정월 2일에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3일 자시子時에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는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작별의 게송을 읊었다.
분명한 일원상을 누가 전승할 것인가 凝圓一相誰能嗄 응원일상수능사
맨몸 그대로 하늘과 땅을 활보한다네 濶步乾坤露裸裸 활보건곤로나나
영원한 보배 그대로인 고향 돌아오니 踏着自家不壞珎 답착자가불괴진
이것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하네 獨尊獨貴唯稱我 독존독귀유칭아
하하하 그것은 도대체 무얼 말하던가 呵呵呵是什麽 가가가시심마
청정하고 걸림 없어 잡을 수도 없다네 淨灑灑沒可把 정쇄쇄몰가파
임종게를 마친 스님은 단정하게 앉아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던 날 밤에 열 줄기로 방광放光을 하였다. 2매枚의 사리를 수습하여 조계산 송광사와 팔영산 능가사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스님의 세수는 87세이고, 법랍은 77년이다. 제자가 수십 명이었는데, 오직 풍암 세찰楓巖世察만이 의발을 전수받은 적자였으니 영해 약탄 스님의 전법 제자였다.
풍암 스님은 부휴계浮休系 벽암문파碧巖門派의 고승이다. 호는 풍암楓巖. 속성은 밀양박씨요, 전라남도 순천 출생이다. 어려서 대구 동화사桐華寺에서 철웅哲雄 스님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그 뒤 무용 수연無用秀演 스님과 그 제자 영해 약탄影海若坦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무용 스님의 입멸 후 영해 스님의 법을 이었다. 개당開堂하여 학인을 지도함에 있어 조금도 가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 순천 모후산母後山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泉庵에서 묵암 최눌默庵最訥에게 법을 전한 뒤 은거, 수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