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대사 지음
조은자 옮김
불교는 ‘단체’를 중요히 여기고 ‘신앙’을 중심으로 삼습니다. 위로는 스승을 존중하고 도道를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에 대해서는 엄숙한 용모와 장중한 태도와 단정한 품행을 지니고, 생활 속에서는 고된 수련을 견뎌내야 합니다. 어떠한 단체 내에서든 타인과는 화합하고, 일처리는 근면해야 하며, 명령에는 ‘복종과 존중’을 해야 합니다.
들어가는 말
저는 역대 군인들이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며 공헌한 정신과 용기를 매우 존경합니다.
과거 저는 군인과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란 지역에 도착해 홍법을 하면서부터 저의 청년회, 홍법대, 합창대, 문예반 등은 모두 현지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는데, 이 많은 학교 가운데는 일반 학교 말고도 군인을 위한 통신병 학교가 있었습니다.
교장을 맡고 있는 강江 장군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도였기에 그곳의 대령·중령·중위 등 많은 장교들이 ‘이란 염불회’의 주된 신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남부지방에 개산한 불광산에도 많은 군인들이 왔습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이어 불광산을 찾아 부처님의 가피를 구했습니다. 그들의 상관들도 불광산을 찾아와 군심을 위무하기 위해 한 번에 1, 2만 개씩의 호신부를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들이 기꺼이 불교를 받아들이겠다면, 당시 경제적 능력은 없었지만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저는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호신불을 만들어 그들에게 심리적 위안을 얻게 하고 싶었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 부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는 부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의 마음도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형 호신불을 통해 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널리 선연을 맺으며, 몇 만 개라 하여도 무상으로 제공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저는 군부대와 많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교육적인 면에서 볼 때, 군대의 교육은 최고로 엄격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생활과 엄격한 규율이 요구됩니다. 이 외에도 군대의 최대 강점은 바로 ‘신의와 명예’입니다. 군인들의 성격은 시원스럽고, 말에는 신용이 있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모호하게 끌고 가는 것과 달리, 군인의 일처리는 항상 말끔합니다.
이처럼 시원시원하고 솔직한 군인에 대해, 특히 저는 산동과 호남 출신의 군인을 매우 존경하며 저도 그들을 ‘고향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들과 왕래하다 보면 그들이 정직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관리는 군대의 관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불교는 ‘단체’를 중히 여기고 ‘신앙’을 중심으로 삼습니다. 위로는 스승을 존중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며, 자신에 대해서는 엄숙한 용모와 장중한 태도와 단정한 품행을 지니고, 생활 속에서는 고된 수련을 견뎌내야 합니다. 어떠한 단체 내에서든 타인과는 화합하고 일처리는 근면해야 하며, 명령에는 ‘복종과 존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지도자에 복종해야 하고, 단체를 아끼고 보호해야 하며, 제도를 존중해야 하고, 단체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는 오직 공헌해야겠다, 책임져야겠다, 법에 따라 일처리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군대든 불문佛門이든 이것들은 모두 관리학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거에 군대의 요청으로 강연하며, 군대에 참고용으로 제공했던 관리학에 관하여 아래 몇 가지로 간추려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널리 선연 맺기 - 인연 관리
1952년, 이란에는 공군 대령이었던 마등馬騰 선생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제가 이란에 와서 홍법해 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신도들을 대표해 제게 편지를 썼던 분입니다.
이란은 제가 가기 전에도 이미 많은 스님들이 요청을 받아 경전 강연을 다녀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들려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곳은 집도 작고, 인구도 몇 안 되며, 불법은 발전되지 않았고, 현지에는 몇몇의 신도교(神道敎: 일본의 민속종교)만 있을 뿐이고, 몇 있는 출가인조차도 연로하였거나 중년 이후에 출가한 사람이었다며, 이란에 대한 인상이 썩 좋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게다가 자장 스님의 부친이신 이란의 유지 이결李決和거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태도가 온화하고 점잖으며 자선가의 선량함도 가지고 있었고, 불교도로서의 위의도 갖추고 있었으며, 보자마자 호감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타이베이에 있는 중국불교회에서 우연히 저를 만났을 때 그는 아주 간절하게 자신들을 위해 이란에 와서 꼭 좀 경전을 강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그에게서 대단히 감동을 받은 저는 그 자리에서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1953년 초에 저는 타이베이에서 4시간 넘게 차를 타고 덜컹거리는 북의로北宜路를 달려 드디어 이란에 도착했습니다. 뇌음사에 도착하니 마당에는 남녀의 옷가지들이 가득 널려 있고, 설날이 가까워져 오니 말린 생선과 고기의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많은 군인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출가자나 누구라도 나서서 저와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스스로 불전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누군가가 만나러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법당 안에서 저는 신도를 위해 재난소멸의 경전을 읽어주고 있는 7, 80세의 노비구니 스님을 보았습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경전을 다 읽은 노비구니 스님이 멀리서 저를 한 번 보시더니 고개를 돌려 가버렸습니다.
다시 몇 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다시 저한테 다가와 말을 걸겠지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과연 그가 다가와 “경전 강연하러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