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관
붓다TV PD
글과 함께 게재한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기록사진과 구룡사 회주 정우스님이 군종교구장으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UN 16개국 위패가 모셔진 판문점 JSA유엔사(무량수전) 모습입니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몇 자 적어봅니다.
2023년 6월도 이제 이틀만 지나가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호국보훈의 달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되새기고 상기시키고자 6·25전쟁 시 결정적인 전쟁 승리의 계기가 되었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합니다.
5,000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맥아더 장군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6·25전쟁 시 많은 전투와 작전이 있었지요. 예를 들자면 한강방어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 많은 전투가 있었는데 왜! 우리는 ‘인천상륙작전’의 전투를 많이 회상하고 6·25전쟁 발발 73주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우리 뇌리에서 기억이 가장 오래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인천! 이곳은 6·25전쟁 당시에 열세에 몰려있던 우리가 전세를 역전시켰던 가장 대표적이고도 위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불자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그러나 이 6·25전쟁의 열세를 단 한 번의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데는 맥아더 장군의 치밀한 전술과 혜안, 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영어로는 Operation Chromite!
때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였지요.
T-34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김일성 부대는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하게 됩니다. 단! 사흘 만에 대한민국의 심장부! 우리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 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동쪽 즉, 마산 남부와 부산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전쟁 상황을 지켜보던 미국은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16개국 군인들로 구성된 유엔군을 이끌고 부산항으로 입항하게 됩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은 불자여러분도 잘 아시는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부산항에 입항하자마자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전면전을 펼칠 경우에 적의 주력부대가 너무 강해 우리 아군에게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가 생각한 것은 남해와 서해의 바닷길을 돌아서 은밀한 작전으로 인천을 한 번에 쳐 버리고 육지로 상륙을 하는 바로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리게 된 것이죠!!
그런대 왜! 맥아더 장군은 왜 인천으로 상륙하려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랍니다.
첫 번째는 서울하고 가까워서 이었습니다. 인천하고 서울의 거리는 불과 3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죠. 바로! 서울을 수복하면,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수도를 회복하는 것이니까요. 수도 서울의 수복은 북한군 주력부대에게 심리적 타격감을 크게 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모든 길을 어디로 나 있습니까? 로마로? 아니죠 바로! 1번 국도의 중심부인 서울입니다. 이 도로를 차단해 버리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 버리니까요. 그래야 식량과 탄약 공급이 안 될 것이 아닙니까? 식량과 군대 물자가 보급이 안 되면 전쟁에서 패하는 것 당연한 진리이니까요!!
그런데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미 해군에서는 반대의 의견을 냅니다. 근데 왜 반대했냐고요! 첫 번째 반대 원인은 인천으로 들어가는 수로가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엔군의 함정이 261척에 7만 명을 태우고 있었는데요, 수로가 좁으면 신속하게 그 군함들이 이동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북한군이 물에 떠 있는 지뢰, 즉 기뢰라도 바다에 띄워 놓으면 이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두 번째 반대 의견은 엄청나게 큰 인천 앞 바다의 조수간만의 차이입니다. 인천이 세계 5대 갯벌 안에 들어간다는 것 불자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무슨 얘기냐 하면요,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밀물 때 신속하게 상륙을 해야 하는데 그 밀물이 차 있는 시간(만조)이 2시간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이때 북한군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면 상륙할 수 없고, 2시간 후 바닷물이 빠져버리게 되면, 약 4km나 되는 엄청난 갯벌이 북한군 눈앞에 펼치게 되는데, 그 질퍽질퍽한 갯벌에 어떻게 군인들과 물자를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문제가 반대 의견으로 대두되었던 것이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이었다고 그 당시 미국 군부에서 말 했다고 합니다. 정말 황당한 성공확률 숫자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확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왜? 적이 성공 확률이 적으니 가장 방심하는 지역이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 그는 뚝심으로 밀어붙이게 됩니다. 아예 날짜까지 잡아 버렸습니다. 밀물이 가장 많이 들어와서 인천 항구에 수심이 가장 깊을 때의 날짜를 맥아더는 계산해 봤던 것이었습니다. 그 날짜들은 9월 15일, 10월 11일, 그리고 11월 3일 단 3일뿐이었는데, 그런데 10월이나 11월로 넘어가면 아무래도 지금 전략적으로도 다급하고 추운 겨울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기후적으로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상륙하기 좋은 날씨인 9월 15일로 정하고, 은밀하게 야심한 시간, 밤 12시로 정하였던 겁니다.
그런데 상륙작전의 성공 시간은 단 2시간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작전을 어떻게 성공시켜야 될까? 맥아더는 두 가지 미션을 던지게 됩니다.
첫 번째는 ‘성동격서’입니다. 이 전술은 중국 손자병법에 나오는 병법으로 동쪽에서 소리를 쳐서 적군의 시선을 쏠리게 한 다음에 적의 허점이 되는 서쪽을 치는 병법을 택하였던 것이죠.
자! 그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겠습니까? 당시 맥아더 장군은 마치 상륙작전을 할 것처럼 거짓 무전을 적에게 흘리는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평양 서쪽, 남포로 상륙한다! 혹은 해주로 상륙한다, 전라도 군산으로 상륙한다, 원산, 주문진, 울진 등으로 상륙한다. 이렇게 북한군을 정신없게 만든 것이죠. 어디로 상륙할지 모르게 말이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폭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병력을 상륙시키기까지도 했는데요,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장사상륙작전’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으로, 작전명 174라고도 합니다. ‘장사상륙작전’은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한 Fake 작전으로, 번역하면 가짜로, 거짓으로 상륙한다는 전술을 펼치게 됩니다. 그런데 가짜지만 상륙할 시 병력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누가 상륙한지 아십니까? 772명의 중고등학생들 즉 학도병이었습니다. 총을 쏘는 훈련도 약 보름밖에 받지 못한 10대 소년들이 차출돼서 문산호를 타고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포항, 울진 부분으로 상륙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이때 태풍을 만나서 배는 좌초되고 맙니다. 772명을 태운 문산호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0대 소년들은 육지로 헤엄쳐 나갑니다. 식량과 총알은 단 3일뿐이었고요. 그들은 용감하게 폭풍우를 헤치면서 나아가게 되죠. 육지로 상륙한 10대 소년병들은 당시 포항과 영천 방면을 잇는 국도를 점거하고, 북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군의 시선은 ‘손자병법 성동격서’ 병법대로 전부 다 여기 있는 동쪽으로 쏠리게 된 것이죠. 이들 10대 소년병들을 구하기 위해 구조선이 출발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소년병들은 그곳에서 교전하다가 작렬이 대부분 전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맥아더 장군의 미션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X-RAY작전’으로 상륙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첩보부대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구성된 첩보부대가 해군 첩보부대가 되겠는데, 이 해군 첩보부대는 은밀히 인천 지역으로 잠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천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아서 적의 해안포 위치, 병력 규모, 그리고 수로에 배치되어 있는 기뢰의 위치와 제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을 하게 되는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것이지요. 이때 활약한 또 하나의 부대 ‘켈로 부대(미 극동군 특수전사령부가 운용한 8240부대로, 6·25전쟁 당시 대북첩보를 수집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게릴라 작전을 벌였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특수부대였는데, 그 부대는 인천 앞 바다에 있는 팔미도 섬으로 상륙해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들 ‘켈로 부대’의 완벽한 임무 수행으로 상륙 당시 등대의 불빛을 켬으로써 맥아더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인천으로 상륙하게 되었던 것이죠. 당시 그들이 켰던 불빛은 전쟁 승리의 불빛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을 9월 28일 수복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게 됩니다. 북한군 주력부대는 오합지졸이 되었고요. 그래서 우리 국군은 계속 북진, 북진해서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지점까지 밀고 올라가게 된 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가 되겠습니다.
자! 전쟁은 끝났습니다. 불자여러분들은 ‘인천상륙작전’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맥아더 장군, 국군, 유엔군이라고 답을 하실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당시 이름 모를 학생들, 그리고 지역주민, 우리 국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6·25전쟁의 열세를 단 한 번의 기회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의 혜안과 지혜를 엿볼 수 있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켜준 그분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추모하는 마음을 단 며칠이라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 전사자는 58,000여명, 연합군은 37,000여명으로 전사자, 부상자, 실종 및 포로 등 총 피해 인원은 479,432명으로 상당한 피해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사망자 수는 373,599명, 부상자는 229,625명, 행방불명이 303,212명으로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이러면 안 되는 말이죠!!
6·25전쟁은 UN에서도 참전했는데, 그 나라들을 열거해 보면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 등 총 16개국으로 전투병력 인원만 하더라도 1,954,484명이 참전해 우리가 힘들 때 우리나라를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등 5개 나라에서는 의료지원 인원으로 총 3,132명을 파병해 우리를 도와주었던 것이죠.
그러나 UN이 파병한 총 16개국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다 살아가지고 못하고 전사나 부상자, 실종, 포로 등이 발생하고 만 것이죠!! 사망자 37,902명, 부상자 103,460명, 실종자 3,950명, 포로 5,817명 등의 씻을 없는 아픔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아플 때, 힘들 때, 어려울 때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주고 함께 하면 고맙고 감사하듯이, 6·25전쟁 발발 73주년을 맞는 2023년 6월 29일 오늘!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6·25전쟁은 끝났지만 그 날의 아픔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UN 참전국 희생 전사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장마가 전국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장마철 건강들 유의하시고, 7월 13일은 먼저 돌아가신 분들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백중 49일기도 입재일입니다. 많은 동참을 바라며 나와 함께 했던 모든 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