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1.
지금 우리는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 제39」의 대강을 살펴보는 중이다. 지난 6월에는 선재 동자가 미륵보살을 만나 법계에 대한 가르침을 배운 장면을 소개했다. 화엄의 법계를 선재에게 일러준 미륵보살은 선재를 작별하며 문수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라고 추천한다. 이에 선재 동자는 미륵보살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하직 인사를 올리고, 문수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독자님들은 기억하실 것이다. 선재 동자가 수행의 여행길을 떠날 때 문수보살 만났던 장면을. 그 장면을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으로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이때 문수사리보살이 비구들을 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고는, 점점 남방으로 가면서 인간 세상에서 지내다가 복성福城의 동쪽에 이르러 장엄당사라숲[莊嚴幢娑羅林]에 머물렀으니, <필자 중간 생략> 이 때에 복성福城 사람들은 문수사리동자가 장엄당사라숲 속 큰 탑 있는 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한량없는 대중이 복성에서 나와 그곳에 이르렀다.”
문수보살과 그 대중들이 ‘복성’ 근처에 있는 숲에 도착한 것이다. 성안에 있던 대중들이 구경을 나왔다. 수많은 구경꾼 중에 5백이나 되는 동자도 있었다. 이른바 선재善財 동자, 선행善行 동자, 선계善戒 동자, 선위의善威儀 동자, 선용맹善勇猛 동자, 선사善思 동자, 선혜善慧 동자, 선각善覺 동자, 선안善眼 동자, 선비善臂 동자, 선광善光 동자들이었다. 물론 동녀들도 있었다.
2.
이때 문수보살은 선재 동자의 과거 인연을 관찰하고는 위로하면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였다. 그리고는 듣는이들 모두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였으며, 또 과거에 심은 선근을 기억하게 하였다. 이에 선재 동자는 부처님과 같은 깨침을 자신도 얻겠다는 발심을 하고는 문수사리보살님께 12수의 게송을 읊었다. 끝의 두 게송만 운허 스님 번역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로 거둬 주는 원만한 바퀴
다 지니는 청정한 광명
이와 같은 지혜의 해를
나로 하여금 보게 하소서.
법왕의 지위에 이미 들었고
지혜의 관을 이미 쓰셨고
법의 비단을 머리에 맸나니
바라건대 나를 돌봐 주소서.
이런 선재 동자의 청법請法 게송에 화답하여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방편 바다에 들어가
부처의 보리에 머물면
지도하는 스승을 따라 배워서
온갖 지혜를 이루게 되리.
그대 모든 세계에 두루하여
티끌 같은 겁 동안에
보현의 행을 닦아 행하면
보리의 도를 성취하리니라.
이렇게 문수보살은 선재의 청법에 화답을 하고 나서는, 선지식을 찾아서 공부하기를 권한다. 선지식을 찾는 일에 고달프다거나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고, 또 선지식을 만나거든 만족한 마음을 내지 말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고, 더 나아가 선지식의 교묘한 방편으로 때로는 짐짓 허물을 보이시더라도, 그런 허물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라고 선지식 대하는 자세까지 자세히 일러준다.
그리고서는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승낙勝樂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곳에 묘봉妙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중에 덕운德雲 비구가 있으니, 그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라고 갈 길을 일러준다. 이리하여 선재 동자는 문수를 떠나, 덕운 비구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다시 덕운 비구가 일러 준 다음 선지식을 찾고, 그다음 선지식도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하여 미륵보살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미륵보살이 문수보살을 만나보라는 것이다. 선재 동자는 결국 ‘뺑뺑이를’ 돈 셈이다. 참으로 대승의 작가는 묘한 구성을 하고 있다.
3.
이렇게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는 대목을 화엄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경학자들은 ④지조무이상智照無二相이라고 과목 이름을 붙인다. 지혜와 관조가 둘이 아님을 밝히는 부분이란다. 즉 선재 동자가 처음 문수보살을 만나서는 ‘지혜’를 배웠고, 재차 문수보살을 만나서는 ‘관조’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 차례의 배움이 선후는 있지만, 본질은 같다는 해석이다.
필자는 화엄경을 <월간 붓다>에 연재하면서, 화엄경 전체가 크게 세 둘레[周]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다. 첫째 둘레는 「여래명호품 제7」~「여래출현품 제37」이고, 둘째 둘레는 「이세간품 제38」이고, 셋째 둘레는 「입법계품 제39」라고 말이다. 그리고 각 둘레는 모두가 같은 주제를 나열하고 있는데, 10신-10주-10행-10회향(발원)-10지-등각-묘각이 그것이다. 화엄경 전체는 이 주제를 세 번 돌려가며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세주묘엄품 제1」에서 「비로자나품 제6」까지는 화엄경 설법을 위한 기초 마당 다지기이다. 즉 설법을 주관하시는 부처님과 그 말씀을 듣는 대중, 그리고 법회가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을 제1품에서 제6품까지 소개하고 있다.
다시 「입법계품」이야기로 돌아가면, 선재 동자가 만난 제1 선지식 문수는 10신信을 표시하고, 제2 덕운에서 제11 자행동녀까지는 10주住를 표시하고, 제12 선견비구에서 제21 변행외도까지는 10행行을 표시하고, 제22 육향장자에서 제31 안주신까지는 10회향(回向, 또는 願)을 표시하고, 제32 바사바연저주야신에서 제41 구바녀까지는 10지地를 표시한다. 여기까지는 단계를 구별하여 그에 따르는 수행의 양상을 보여 주는 방식인데, 이것을 화엄 경학의 전문 용어로 ①기위수행상寄位修行相이라 한다.
다음에 제42 마야부인에서 제53 문수보살까지는 등각等覺을 표시하고, 마지막의 제54의 보현보살은 묘각妙覺을 표시한다. 그런데 등각을 표시하는 11명의 선지식 만남을 통해 보여 주는 가르침의 양상을 다시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 제42 마야부인에서 제51 덕생동자와 유덕동녀까지는 ②회연입실상會緣入實相이라고 한다. 즉 여러 가지인연을 모아서 끝내는 진실의 세계로 귀결시키는 방식의 법문이라는 뜻이다. 둘째, 제52의 미륵보살을 만나는 장면에서 보여 준 가르침의 방식은 ③섭덕성인상攝德成因相이라고 한다. 즉 수행에서 얻은 일체 모든 공덕은 궁극적으로는 성불의 원인이 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셋째, 제53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서 가르쳐 준 가르침의 양상은 위에서 말한 ④지조무이상智照無二相이다.
4.
선재 동자가 긴 구법 여행에서 제53번째로 만난 선지식이 다시 문수보살이다. 자, 그러면 110개의 성을 거쳐 보문국普門國 소마나蘇摩那성에 도착해서 문수와 선재가 만나는 장면을 소개해 가기로 한다. 문수보살은 멀리서 오른손을 펴서 110유순을 지나 선재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독자들은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선재 동자가 처음 문수를 만난 것은 복성福城 동쪽에 있는 숲이었다. 거기에서 문수를 작별하고 선재는 남쪽으로 구법 여행을 떠나 보문국까지 온 것이다. 당연, 문수는 복성 근처 숲에 남아있다. 그런 문수가 오른손을 길게 뻗쳐 110유순이나 멀리 떨어진 선재 동자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이다. 문수보살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방법이다. 누구나 지극 정성으로 노력하면 문수보살의 쓰다듬을 입을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은 문수보살의 첫마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 번역을 인용한다.
“착하고 착하다. 착한 남자여, 만일 신근信根을 여의었던들 마음이 용렬하고 후회하여 공 닦는 행이 갖추지 못하고 정근에서 퇴타하여 한 선근에도 집착하고 조그만 공덕에도 만족하다 하여 교묘하게 행과 원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의 거두어 주고 보호함도 받지 못하며, 여래의 생각하심도 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러한 법의 성품․이러한 이치․이러한 법문․이러한 수행․이러한 경계를 알지 못하고 두루 앎과 가지가지 앎과 근원까지 다함과 분명하게 이해함과 들어감[趣入]과 해탈함과 분별함과 증득함과 얻는 것을 모두 할 수 없으리라.”
원체 중요하니 한문의 원문 첫 부분을 소개한다. “약리신근若離信根, 심열우회心劣憂悔, 공행불구功行不具”이다. ‘약리신근’과 ‘심열우회’ 사이에 토吐를 ‘하고’라고 붙이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하면’이라고 붙여야 한다. 만약에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이하의 여러 공덕과 효과도 없었을 것이라는 조건문이다. 나무의 뿌리[根]처럼 믿음이 있어야만 열매가 맺히는 것과도 같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함을 알리는 대목이다. 운허 스님은 번역에서 여러분도 보다시피 “신근信根을 여의었던들 마음이 용렬하고 후회하여 공 닦는 행이 갖추지 못하고”라고 하여, ‘던들’이라고 조건문으로 처리했다. 탁월하신 경안經眼이시다. 믿음이 없이는 고난을 이겨 내고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
이어서 몇 가지 법문을 더 하고 선재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문수는 자취를 감춘다. 홀로 남은 선재는 사유하고 관찰하며 문수보살 보기를 원하였고, 그러면서 수많은 선지식을 뵙고 친근히 하며 그 가르침을 받아 실천한다. 끝내는 보현보살의 해탈 경계를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보현보살 만나 뵙기를 발원한다. 다음 달에는 보현보살 만나는 장면을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