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운
텃밭농부
올해 하지夏至는 6월 21일이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가장 긴 날로, 14시간 40분가량이었다. 사람도 활동하기 좋은 때이며, 작물은 물론 풀들도 쑥쑥 자라는 시기이다. 이날 마늘을 뽑았다.
알이 제법 굵다. 이만하면 이번 마늘 농사는 풍작이다. 마늘이 한창 굵어지는 시기인 4, 5월에 하늘님이 매주 한 번씩 비를 내려주었다. 햇볕도 듬뿍 받아서인지 병도 들지 않았다. 작년 11월 초에 심었으니, 밭의 흙 속에서 일곱 달을 지나왔다. 1년생 작물 중 마늘이 재배 기간이 가장 길다. 마늘은 사계절을 모두 겪는다. 겨울 때에는 흰 눈을 덮고 흙 속에 뿌리를 내린다. 봄에는 싹을 틔운다. 여름에 들어서는 알을 키우면서 특유의 아린 맛을 담아낸다. 수확량은 네 접 정도다. 이 양이면 우리 식구들이 김장할 때까지 실컷 먹고 양념으로도 모자라지 않다.
8년 지켜온 3무 원칙
얼마 전 밭에 제초매트를 깔았다. 나에게는 큰 사건인데, 3무無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3무란 무경운, 무화학, 무기계를 말한다. 무경운은 밭의 흙을 깊이 뒤집지 않는 것이다. 무기계는 경운기 같은 큰 기계를 쓰지 않는 것이다. 50평 크기이니 경운기를 들이지 않고도 관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굳이 기계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지난 봄에 경운기로 한 번 갈아주겠다는 제안이 있었으나 사양했다. 내 몸과 삽과 쇠스랑 등의 도구로 무너진 둑을 북돋아주고 물길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힘겨운 노동이어서 2, 3일 끙끙거리는 근육통을 감수해야 한다. 무화학이란 밭에 화학물질, 즉 화학비료, 비닐 등 석유에서 화학적으로 뽑아낸 자재를 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이 밭을 일구기 시작한 이후 8년 동안 지켜졌다. 그러나 올해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밭의 주인이 바뀐 게 가장 큰 변화다. 주인은 평생 농사일로 자식들을 키우고 조그만 집을 마련한 70대 중반의 노인이다. 한때 농업용 비닐하우스 만드는 일도 했는데, 톱날에 잘린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는 여기에서 농작물을 수확해 부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판매한다.
노인은 밥 먹을 때 종종 나를 부르며, 수확한 무와 배추를 나눠줄 정도로 인심이 좋다. 농사 경험이 많으니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밥과 수확물과 농사지식을 나누어주니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풀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압박한다. 노인은 봄이 끝날 즈음 밭 둘레에 제초제를 뿌렸다. 마주칠 적마다 풀을 베라고 종용한다. 작년까지 나는 풀이 한두 뼘쯤 자라길 기다려 자란 풀을 베어서 밭둑을 덮었다. 풀로써 덮기를 하는 것이며, 이 풀이 유기물로 섞이도록 했다. 이 방식을 쭉 이어왔다. 그런데 이는 풀 베는 시기를 놓치면 씨를 맺어 바람에 날리게 하는 단점이 있다. “비싼 돈 들여 약을 쳐놨는데, 풀 안 잡고 뭘 해. 풀씨가 날리면 온밭이 잡초더미가 돼.” “풀을 이기지 못하는구먼.” 풀을 베라고 재촉하며 나에게 던진 노인의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세우고 지켜온 원칙은 흙을 살리고, 화학물질로 뒤덮인 세상에 휩쓸려가지 않겠다는 작은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내 방식이 좋은들 주위에 피해를 준다면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관행 농사를 하는 이웃이 있다는 새로운 조건에 맞춰야 좋은 것이다. 그가 변하지 않는다면 조건에 따라 내가 변해야 한다. 내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비닐 대신 잡초매트를 쓰기로 했다. 비닐은 한 번 쓰고 버린다. 잡초매트는 여러 해 동안 쓸 수 있다. 요즘은 밭에 나가면 잡초매트를 덮는다. 석유 냄새가 확 풍겨온다. 나의 원칙에서 한발짝 물러나는 대신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나를 위로한다.
유럽의 혹독한 여름
우리나라의 올해 장마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예년의 경우 6월 10일경 제주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다. 기상청에서는 7월 초에 장마가 시작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참 늦은 늦장마가 되는 셈인데,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장마전선은 일본 남부와 동북쪽에 걸쳐 있다. 태풍도 8개 발생했는데, 대부분 일본을 향해 갔다. 큰비가 내리지 않고 폭풍 피해가 없으니 다행이다.
유럽 지역은 뜨거운 기온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가지 않은 시기인데도 최고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 저 정도의 기온이면 일상생활이 어렵다. 초등학교는 휴교에 들어갔으며, 파리 에펠탑은 고온의 여파로 폐장 시간을 앞당겼다. 병원 응급실은 열사병 환자들로 비상이 걸렸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지구온난화의 현실을 유럽이 혹독하게 겪고 있는 것이다.
고온 현상은 농사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람도 그렇거니와 작물도 이런 고온을 겪어보지 못했다. 충분히 자라기 전에 이삭이 패는 이상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알곡보다 쭉정이가 많은 수확철을 맞이할 수 있다. 동물들도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닭은 알을 낳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위기 상황이 되면 후세를 남기려는 본능이 작동한다. 그런데 상황이 더 좋지 않으면 후세보다는 자기보존에 에너지를 쏟는다. 시설이 갖춰진 동물 농장일지라도 온습도 조절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더 쏟아부어야 하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오래 전 예측했던 나쁜 시나리오가 올해 유럽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커졌다.
내년엔 더 뜨거워진다는데
올해 한 번 겪는 일이라면 그나마 어떻게든 견뎌내겠지만, 기상학자들은 내년에는 더 강력한 엘리뇨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엘리뇨는 태평양의 수온이 올라가는 현상인데, 이렇게 되면 기온이 오르고 수증기 증발이 많아져 폭우가 쏟아진다.
농사의 흉작, 이에 따른 고물가는 예기치 않는 사건으로 번질 수 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서 발생하는 분노는 약자와 소수자들을 향해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최근 영국에서는 아프리카와 무슬림 이민자들을 향한 방화와 폭력이 발생했다. 지난달 스위스에서는 자국의 인구를 천만 명으로 유지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즉, 이민자 수를 제한하자는 것이다.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결과는 근소한 차이의 부결이었다. 이민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나라로 알려진 스위스에서도 반이민 정서가 팽배해진 것이다. 그 근저는 경제적 어려움인데, 이민자들에게 세금을 쏟아 붓는다는 주장이 급속도로 퍼지며, 급기야는 폭력을 불사한다. 특정한 나라의 현상이 아니다. 대개의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다. 기후위기는 고온과 폭풍우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불안의 불씨가 된다는 점에서 불길한 것이다.
내 텃밭농사의 경험으로 짐작하건대, 농사의 팔할은 자연이 한다. 사람은 밭을 일구고, 거름 주고, 씨 뿌리고, 병충해 방제하고, 거두는 일을 한다. 농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밭은 하늘이 내어준 것이다. 햇살과 바람과 물도 하늘이 내려준다. 요즘이야 시설을 갖춰서 자연이 하는 일을 사람이 하지만, 그래도 자연의 일을 모두 대체할 수는 없다. 하늘의 일을 대신한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바람을 막고 온습도를 조절하는 것은 기계장치를 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가동하는 전기에너지는 석유에 크게 의존한다. 악순환의 되풀이다. 여기서 어서 벗어나라는 것이 기후 위기가 전해주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