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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속에 핀 연꽃,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

김석종
경향신문 선임기자


그날, 나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 불교계에서 시국법회를 연 7월 4일 저녁이었다. 조계사에서 묵언행진을 시작한 500여 명의 스님들이 합장을 하고 대형 촛불소녀 장엄등을 앞세운 채 시청광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스님과 불자, 시민 등 2만여 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말 그대로 야단법석이 열렸다. 법고에 이은 삼귀의와 반야심경으로 시작된 이날 행사에서 시국법회 공동추진위원장인 수경스님은 "온 생명의 무리가 바로 보살의 정토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자리에 모인 "이라며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세상을 있게 한 공업 중생으로서, 모든 허물을 나에게로 돌려 비추는 참회의 기도 를 통해 하늘과 자연이 감응하여 우리 모두를 돕도록 하자"고 말했다.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스님은 법어에서 "한 눈으로 보면 촛불만 보이지만 두 눈 으로 보면 촛불 속의 영혼까지 보입니다"라고 설했다. 집행위원장인 성묵스님은 결의문에서 유마경을 인용했다. "모든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 역시 병들었으며, 모든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내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
하여 생사에 들기 때문입니다." 운문사 교무국장 운산스님은 발원문에서 "어디에서나 주인으로 살고, 우리 서 있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게 하자"면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을 발원했다. 사부대중들은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에 따라 108배를 올렸다. 광장이 비좁아 선 채로 합장 반배하는
이들도 많았다.

“중생을 다 건지겠다고 서원해 놓고 오로지‘나’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허물을 참회하며 첫번째 절을 올립니다.”“바른 말을 해야 할 때 바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큰 거짓말임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스물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물러섬이 없는 믿음으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의 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이어 2부에서는 시청-숭례문 앞-남대문시장 앞-을지로입구-시청을 돌아오는 참회의 행진을 벌였다. 사천왕 장엄등이 촛불소녀를 호위했다. 연등과 종이컵에 연꽃잎 모양의 종이를 붙여 만든 ' 촛불'이 장강(長江)처럼 흘러갔다. 그날 불자들이 켜든 촛불과 연등은 아름다웠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청초한 연꽃처럼. 불심을 하나로 묶어 무명을 환하게 밝혀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처럼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함께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법석을 연 것은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 말고는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시국법회의 여법한 의식과 말과 행동들은 본질을 바로 찔러 들어가는 불교의‘미학’을 제대로 보여준 자리였다. 이 땅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불교의 '내공'도 여실히 보여줬다. 촛불 속에 담겨진 한국사회의 미망(迷妄)을 깨는 죽비소리가 청청하게 울려나왔다.

이날“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픕니다"라는‘유마경’의‘동체대비(同體大悲)’와 언제 어디서나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라는 '임제록'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가르침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청화스님의 법어는 들끓는 민심에 눈감고 귀 닫은 정부에 대해 "두 눈 모두 뜨고 촛불의 영혼을 보라”는 쩌렁쩌렁한 할이었다.

촛불 민심의 본질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결과였다. 소는 본래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 채식동물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소를 살찌우기 위해 고기를 섞은 사료를 먹이면서 소들이 주저앉고 미쳐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 광우병을 불러왔고, 결국 부메랑이 되어 인간 사회에 화가 미치게 됐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업(共業)이면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의 과보다. 시국법 시국법회에 참석한 스님과 불자들이 조계사에서 시청 앞으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회 108참회문은 "인간중심주의가 지구 생명 공동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라고 참회하고 있다. 선수행(禪修行)에 바탕을 둔 불교는 인간이 아닌 모든 무정물에게도 존엄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세상 만물이 다 부처의 몸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에도 탐진치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인 30개월령 쇠고기 수입 요구를 들어주고 전자제품, 자동차 등 국내 제품을 수출해 이익을 얻으려고 성급히 '탐심'을 부렸을 것이다. 또 위험하기 쩍이 없는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국민을 적대시하는 '진심'과 '치심'을 드러냈다. 어찌 우리나라 미래의 부처님들에게 '미친소' 를 먹으란 말인가.

흔히들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에 화가 난 불교계가 목탁소리를 높였다고 말한다. '불심'이 이대통령으로부터 돌아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 또한 불교계를 폄하하는 것이다. 불교계가 나선 것은 생명 평화에 대한 경외심과 주인인 국민을 정부가 폄하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날, 나는 시청앞 광장에서 '촛불'의 원인이 된 '미친소'를 떠올리며 절집 대웅전 외벽에 그려져 있는 '심우도(尋牛圖)'를 생각했다. 심우도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와 목동에 비유해 그린 10폭의 그림이다. 소는 인간 본성(깨달음)을, 목동은 수행자를 뜻한다. 목동은 심우(尋牛·소를 찾아 나섬), 견적(見跡·소의 발자취를 봄), 견우(見牛·소의 존재를 확인함), 득우(得牛·소 고삐를 잡음), 목우(牧友·소를 길들임), 기우귀가(騎牛歸家·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옴), 망우재인(忘牛在人·소는 사라지고 사람만 남음), 인우구망(人牛俱忘·소도 사람도 다 잊음), 반본환원 (返本還源·본래로 돌아감), 입전수수(入廛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도와줌)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다.

선수행의 아득한 경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깨달음의 최종 목적은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온전히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길(道)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불교의 촛불은 '미친소'에서 멈출 일이 아니다. 쇠고기도 방편일 뿐이다. 안으로는 수행자로서 계율을 벗어나지 않고, 밖으로는 생명과 자연과 평화의 '정법'을 가르치는 '반본환원'과 '입전수수'로 나아갈 일이다. 그날 시국법회추진위원회는 정부와 시민들에게 잡보장경한 구절을 행동의 화두로 내려줬다.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절집의 수행자들 스스로 각자 마음속에 켜들었던 이 '화두'의 촛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