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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와 8정도

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


지난 시간에는 12연기와 4성제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12연기는 유전문과 환멸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12연기의 유전문만이 아니라 환멸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연기하는 과정이 유전문이기 때문에 유전문만으로는 완전한 진리라고 할 수가 없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가 있어야 비로소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 드렸듯이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고성제와 집성제를 이루고 있고, 환멸문은 명성제와 도성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 시간까지는 유전문에 대하여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환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연기의 환멸문은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노사가 소멸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멸문은 사성제의 도성제, 즉 팔정도가 됩니다.
무명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정견(正見)을 갖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오온이라는 허망한 자아를 집착함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아 우리가 집착하는 자아가 허망한 오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명이 멸하고 정견이 생긴 것이지요. 이와 같이 무명이 멸한다는 것은 정견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견이 생기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자아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무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팔정도의 정사유, 정어, 정업입니다. 이렇게 정견으로 바른 삶을 살아갈 때 무명에서 연기한 신구의(身口意) 삼행(三行)이 사라지게 됩니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정견이 생겨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연기의 식과 명색은 분별심으로 대상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중생들의 의식구조를 의미합니다. 중생들은 몸속에 있는 식(識)이 몸 밖의 명색(名色)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잘못된 의식구조는 정견에 의한 바른 삶을 끊임없이 실천할 때 사라집니다. 이렇게 바른 삶을 끊임없이 실천 하는 것이 팔정도의 정명(正命)과 정정진(正精進)입니다.

팔정도의 정념(正念)은 사념처(四念處)를 의미합니다. 사념처는 우리의 몸을 관찰하는 신념처(身念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하여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 합리성과 보편존재도 시간도 어리석은 마음, 즉 무명에서 연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알아 나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참된 삶이 실현되는 무아의 삶, 이것이 12연기의 환멸문이며 팔정도인 것입니다. 타당성의 원칙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자를 말하며, 붓다의 가르침은 경전에 있다.
그러므로 불자로서 현실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해결책은 바로 경전에서 찾아야만 한다.
處), 느낌을 관찰하는 수념처(受念處),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심념처(心念處), 그리고 마음에 인식되는 사물을 관찰하는 법념처(法念處)입니다. 이러한 사념처 수행을 통해 12연기의 육입(六入), 촉(觸), 수 (受), 애(愛), 취(取)가 소멸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대상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육입(六入)입니다. 신념처 수행을 통해 이러한 육입(六入)은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육입(六入)의 멸은 신념처의 수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수념처는 대상을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느낌, 즉 수(受)를 여실하게 관찰하는 수행입니다.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고락을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념처 수행을 통해 고락의 감정은 촉에서 연기하는 현상일 뿐 우리 몸속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수념처 수행을 통해 촉(觸)과 수(受)가 소멸하게 됩니다.

심념처는 대상을 애착하고 취착하는 우리의 마음을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속에 애착하고 취착하는 마음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념처 수행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마음은 실체가 없이 무상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심념처 수행을 통해 12연기의 애(愛)와 취(取)가 소멸합니다.

법념처는 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믿고 있는 오온에 대한 관찰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라고 믿고 있는 오온은 모두 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아가 아닙니다. 이렇게 법념처 수행을 통해 오온을 자신의 존재(有)라고 생각하는 망념이 사라지게 됩니다. 법념처 수행을 통해 12연기의 유(有)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팔정도의 정정(正定)은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이 사라진 열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2연기의 생(生)과 노사(老死)는 정정의 성취를 통해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12연기의 환멸문은 사성제의 도성제, 즉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12연기의 환멸문, 즉 무명이 멸하면 노사(老死)가 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정견을 가지고 부지런히 바른 삶과 수행을 행하는 팔정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무명이 멸하지도 않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정견에 의해서 본다면 나와 세계라는 존재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실체가 없이 연기한 것을 공(空)이라고 했습니다.
진리, 즉 연기법이라는 정견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연기한 것이므로 공(空)이고, 존재가 공(空)이기 때문에 존재로 인해 나타나는 시간도 공(空)입니다. 팔정도는 이러한 공(空)의 세계를 깨닫고 무아를 실천하는 참된 삶을 의미합니다.

용수 보살은『중론』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공(空)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시간은 머물 수 없고, 시간은 갈 수도 없다. 시간이 머물 수도 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시간의 모습(과거, 현재, 미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時住不可得 時去不可得 時若不可得 云何說時相)

사물로 인해 시간은 존재하나니 사물을 떠나서 어떻게 시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어떻게 시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因物故有時 離物何有時 物尙無所有 何況當有時)

존재도 시간도 어리석은 마음, 즉 무명에서 연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알아 나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참된 삶이 실현되는 무아의 삶, 이것이 12연기의 환멸문이며 팔정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