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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승들이 설법하는 방식

-백장 스님의 경우-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ananda@yonsei.ac.kr


1.
백장(749-814) 선사는 마조 도일 선사의 제자로, 육조 혜능 선사의 증손자이다. 백장 스님 문하에서 위산 영우 선사와 황벽 희운 선사 등이 배출되었고, 황벽 선사 문하에서 임제 선사가 나왔다. 훗날의 선사들과는 달리 백장 선사는 젊은 시절에 대장경을 자세하게 독파했다. 그래서 그런지 백장 선사의 대화에는 교학에 대한 지식이 넘치고 있다. 이하에 소개하는 내용은 백장 선사께서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인데, 『백장광록』에 실린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께 어떤 맥락에서 언어로 설법을 하셨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출자스님들도 선승이라면 이런 관점에서 설법을 해야 할 것이다. 또 교학을 무시해서는 최상의 선禪이 되지 못함도 알아야 할 것이다.
<2> 부분에서는 마음을 쓰는 법 즉 ‘마음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고, <3> 부분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읽는 자세를 밝혀주고 있고, <4> 부분에서는 선승으로서 상대방에게 설법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백장 선사의 이 말씀을 재가불자들도 잘 마음에 새겨두고 선승의 설법을 들어야 한다.


2.
남에게 불법에 대해 말을 할 경우에는 ‘주인’에게 하는 말인지 ‘나그네’에게 하는 말인지를 가려야 한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 법에 탐착하여 그것들로부터 어지럽힘을 당하면, ‘제 마음(自心)’이 도리어 마군의 왕이 되고 ‘관조 작용(照用)’은 마군의 백성이 된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에 항상 성찰하고 지각하는 작용’에만 주목할 뿐이다. 있느니 없느니 하는 모든 법과 세간 출세간법에 머물지 말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생각을 내지 않는 것에도 머물지 마라. ‘자기 마음(自心)’은 부처이고 ‘관조 작용(照用)’은 보살 마음이다.
‘마음’은 주재主宰이고, ‘관조 작용(照用)’은 객진 번뇌에 속한다. 파도로 물(水)을 설명하듯 만상을 관조하되 인위적인 작용(功) 없이 하라. 이렇게 고요하게 관찰(寂照)하면서도 이것이 오묘하다는 티를 내지 않으면, 자연히 고금의 (지혜를) 관통할 수 있다. 그래서 『능엄경』에서 “제 마음 속에 간직된 신령에는 관조라는 조작(照功)이 없으나, 제 마음 속에 간직된 신령에는 지극한 작용이 항상 있다”고 한 것이다. 제 마음 속에 간직된 신령이 어디서든 우리를 인도하는 스승이 되는데, 중생의 성품은 그것을 알면서도, 부처가 되는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못하니, 이는 집착하는 성품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사태(法)에 대하여,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집착을 내어, 어쩌다 묘한 가르침을 만나도 효과를 보지 못하며, 어쩌다 격외도리格外道理를 들어도 그런 사람들은 믿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49일 동안 묵묵히 계시면서, 지혜로 명상하셨지만, 깜깜하여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고 비유할 수도 없으셨다.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만약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에 빠지는 오류’를 범한다. 한편 불성이 없다고 말하면, ‘허망에 빠지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이는 마치 불성이 있다하면 ‘보태는 오류’를 범하고, 불성이 없다하면 ‘덜어내는 오류’를 범하며, 불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모순을 범하는 오류’를 범하고, 불성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같다. 이런 내용은 『화엄경』에 자세하다.



3.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말씀하려 하지 않으셨으나, 그랬다가는 중생이 해탈할 기약이 없겠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씀을 하시면 중생이 또 말을 좇아 견해를 내서, 적은 데는 덧붙이고 많은 것은 덜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설법을 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겠다”라고 『묘법연화경』 「방편품」에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나 과거 부처님께서 모두가 3승법을 말씀하셨음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방편으로 설법하고 방편으로 문자를 세웠던 것이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저들을 위하여 부처라 했고, 본래 보리가 아닌데 보리 열반 해탈 등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저들이 백 섬의 무게를 지고는 도저히 일어나지 못함을 아시고, 우선 한 되 한 홉을 지워주었다. 그가 ‘궁극적 교설’을 믿는 것이 어려운 줄을 아시고, 저들에게 ‘방편적 교설’로 설명해 주셨다. 그리하여 선법이 퍼져 악법을 이기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선善을 받을 만한 과보의 기한이 다되면, 악惡의 과보가 바로 도래한다. 부처가 되면 중생도 나타나고, 열반에 들면 생사가 나타나며, 밝아지면 어둠이 오는 법이니, 그러나 이것들은 유루有漏 인과가 뒤덮는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주고받음이 없을 수 없다.
만약 유루의 인과에 얽히는 일을 면하려면, 그저 상대적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수많은 제약도 들러붙지 못한다.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으며, 높지도 낮지도 않고, 평등도 없고, 오감도 없다. 그저 문자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그대를 막는 양쪽 극단이 그대를 얽매지 못하고, 번갈아 나타나는 고락과 엇갈리는 명암에서 벗어나게 된다. 참으로, 진실 또한 진실이 아니며, 허망 또한 허망이 아니며, 셀 수 있는 물건도 아니어서, 마치 허공처럼 다듬을 수도 없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내면, 수많은 속박에 매이게 된다.


4.
대저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3구句, 즉 ‘초보적인 선善’, ‘중간 정도의 선善’, ‘궁극의 선善’으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좋은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며, 중간에는 좋다는 마음조차 부수며, 마지막에는 이름만 선善하다고 한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라 하는 것이다. 법은 법이 아니며, 법이 아님도 아니다. 모두 이런 부류이다. 만약 단지 한 구절만을 말하면, 중생들을 지옥에 빠트리는 것이다. 위의 3구句를 한꺼번에 설명하면, 저들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갈 터이니, 그랬다가는 ‘부처님께서 목표하셨던 일’과는 상관없어지고 만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에 항상 살펴 알아차리는 본바탕’이 바로 본래 자기의 부처라고 설하면 ‘초보적인 선’이다. ‘지금 이 순간 항상 살펴 알아차리는 본바탕’에 집착하지 않으면 ‘중간 정도의 선’이고, 매이거나 집착한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궁극의 선’이다. 이상과 같이 하면 연등불의 후의 부처에 속한다. 이는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 말하지 말라! 부처는 범부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고, 성인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초조 달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위적인 조작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어야 성스러운 부처님이다”고 하셨다. 여기서 성스러운 부처님이란 9품品의 최고 정령精靈인 용 같은 축생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석천과 범천 이하 모든 신들도 다 신통변화를 부릴 수 있다. 상품上品의 정령도 백 겁 고금의 일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찌 그들을 부처라 하겠는가? 저 아수라왕은 수미산 두 개와 맞먹을 정도로 몸이 매우 크다. 그러나 제석천과 싸울 때에 힘이 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백 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 뿌리 구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들의 신통변화와 말재주가 약한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는 할 수 없다. 등급의 화려하기와 소박하기가 다르고, 오르고 내림의 등급이 천양지차이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 그러므로 『위산경책주』에서 말하기를, “옛날과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옛날 하던 짓이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