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숙
수필가·문화센터 강사
우리는 항상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을 갈구하면서도 때로는 슬픔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왠지 상대의 우수어린 모습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저 사람의 우수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도 갖게 된다. 너무 밝은 모습으로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뭐가 그리 즐겁고 행복할까? 어떻게 살면서 어려움과 슬픈 일이 없을 수 있나” 하는 생각에 그들의 모습이 위선적인 태도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특별한 호기심도 안 생기고 상대에 대한 매력이 반감하는 경우도 있다. 이율배반의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슬픔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슬픔에서 느끼거나 찾으려는 경우도 있다.
지혜는 연령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나 슬픔, 위험한 상황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낸 사람이 행복한 시간만을 보낸 사람보다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 슬픈 것이, 불행한 것이 미래의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행복 바이러스보다 절망 바이러스는 전염력이 더욱 강해 상대가 불행하고, 주위 사람들이 헤쳐 나오기 힘든 불행에 빠져 있으면, 우리도 금세 불행의 늪에, 슬픔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느낌이 밀려든다. 행복보다는 슬픔에, 희망보다는 절망에 감정이입이 빨리 되기 때문인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성의와 배려라는 백신이 빠진 자리에 절망 바이러스가 번식한다”고 한다. 누군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주고 분위기를 바꿔주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진심이 담긴 따뜻한 격려의 말은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버스로 갈아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어려울 때 옆에서 지켜봐 준 사람을 우리는 평생 기억의 저장고에 저장하여 잊지 못한다. 우리가 잘 나가고 상승 곡선을 그리며 행복할 때보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용기와 희망을 주는 희망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됐으면 좋겠다. 절망 바이러스보다, 희망의 백신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더욱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