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벽계 정심은 불교탄압이 극심했던 고려 말과 조선전기를 살다갔다. 그가 한국불교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있었던 한국불교의 법맥을 단절시키지 않고 이어간 것이다. 특히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불가의 선맥禪脈은 벽계로부터 기사회생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 선의 법맥法脈은 임제종臨濟宗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의 정통은 당唐나라의 고승 임제의 종지宗旨로 이어졌고, 그를 근본으로 하여 이어진 종풍宗風은 우리나라에까지 뻗어 나갔다. 예컨대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는 1347년(충목왕 3) 7월 중국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도를 인정받고, 「태고암가」의 발문과 가사袈裟를 받았다. 때문에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해동초조海東初祖이다.
『해동불조원류』에 이르기를, “승려 정심淨心의 법호는 벽계이며, 금산金山 최씨로 멀리 구곡龜谷의 법맥을 이었다. 또 명明에 들어가 임제종의 총통總統화상으로부터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돌아왔다. 공양왕 때 사퇴하였으며, 뒷날 불교 탄압沙汰으로 인해 환속하여 머리를 기르고 처자와 함께 황악산黃岳山 고자동古紫洞 물한리物罕里에 은거하여 자취를 숨겼다. 문득 수족手足을 열어 벽송碧松에게 선을 전하고 정련淨蓮에게 교를 전하였다.” 하였다.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벽계 정심을 소개한 글이다. 그가 인용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는 영조 때 채영采永스님이 기록한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맥을 정리한 승가僧伽의 족보族譜이다. 자료에 의하면 벽계는 명나라로 들어가 임제종 문하에서 수행하여 도를 얻고 깨침의 인가를 받아 귀국하였다고 한다. 다만 벽계가 공양왕 대의 인물이라는 지적은 그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조선전기는 이 법맥이 단절될 위기가 있었다. 고려 말부터 시작되어 조선의 전시기까지 이어진 불교탄압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불가佛家의 법맥法脈조차도 소멸시킬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벽계가 환속하여 여염집으로 숨어 든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태종은 사찰 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국가로 환속시키고,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여 11종 242사만을 인정하였다. 이에 머물지 않고 11종의 종파를 7종으로 축소시켜버렸다. 세종 역시 7종의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의 2개 종파로 통폐합시켰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의 사찰출입을 금지시키고, 전국의 사찰을 36사로 축소시켰으며, 도성 안에서 불교경전을 독송하는 행사까지 폐지시켰다. 이후 숭불의 군주 세조대에는 불교가 중흥할 수 있었던 기회도 마련되었지만, 성종 때 다시 억불정책이 시작됐다. 왕은 도성 안의 염불소念佛所를 금지하고, 세조 때 설치했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을 폐지하였다. 아울러 승려가 될 수 있었던 도첩의 발급을 정지시키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군인으로 충당하였다. 반면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는데,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조항들이 강화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실공이 성리학을 국가이념이자 통치철학으로 공식화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역시 당시 불교계의 본사本寺였던 흥덕사興德寺와 흥천사興天寺를 관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승려를 관공서의 노비로 삼고, 토지를 몰수했으며, 승과도 폐지했다. 요컨대 당시 불교계의 교단과 출가자의 수적 축소, 그리고 사찰소유 토지와 노비가 국가로 환수되면서 사원경제는 크게 위축되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 당시 스님들은 구곡 각운龜谷覺雲처럼 산중으로 들어가 일생 동안 나오지 않았는가 하면 벽계처럼 황악산黃嶽山으로 들어가 처자식을 거느리고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모습으로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수행자의 풍모를 숨기기는 했지만, 그들이 불법을 수호하고자 했던 의지는 산중에 은둔하거나 처자식과 함께 살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법正法에 대한 믿음과 철저한 수행정신은 오탁악세五濁惡世도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선禪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 전하고, 교敎는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 전하여 선교 두 파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퍼져 나가게 하였다. 무상하도다. 시절의 운명이여!
범해 각안이 쓴 『동사열전東師列傳』은 벽계가 두 사람의 제자에게 각각 선과 교를 전해주어 해동불교의 법맥이 의연히 계승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조선후기 불교의 사상 및 수행체계를 제시하고 불교중흥의 방향을 설정했던 청허 휴정은, 조사祖師인 벽송 지엄, 자신의 전법사傳法師 부용 영관과 수계사授戒師 경성 일선의 행적을 다룬 「삼노행적三老行蹟」을 찬술하여 법맥 계보에 대한 인식을 표명하였다. 즉 벽송 지엄이 간화선을 주창한 송의 대혜 종고와 원의 임제종 선승 고봉 원묘를 멀리 이었다고 밝힌 것이다. 휴정은 벽송 지엄의 진영에서 다음과 같이 찬문讚文을 썼다.
“어두운 세상 홀로 밝히는 등불이요(昏衢一燭), 진리의 바다를 건너는 외로운 작은 배(法海孤
舟). 아! 스님의 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鳴呼不泯), 천추만세토록 이어지리(萬世千秋).”
그러면서 “대사가 해외의 사람으로서 5백 년 전의 종파를 은밀하게 이었으니 이는 유교의 정자와 주자가 천년 뒤에 나와 멀리 공자와 맹자를 이은 것과 같다. 유자儒者나 승려나 도를 전하는 데 있어서는 같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일찍이 임제종지를 계승한 벽계 정심의 정법 수호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벽송의 법法은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과 경성 일선(敬聖一禪, 1488~1568)에게 전해졌다. 요컨대 휴정은 할아버지 벽송 지엄, 스승 부용 영관, 수계사 경성 일선의 행적을 복원하고, 소개하면서 해동의 불법이 꺼지지 않고 등불을 밝힐 수 있었다고 천명한 것이다.
벽계 정심의 사상과 수행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찾을 수 없고, 그 편린만 남아있다.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는 역할을 했지만, 혹독했던 시절인연과 후학들의 무관심으로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나는 산을 내려온 후에 벽계 정심 때문에 북산北山으로 옮기려는 것을 그만두고 남쪽 바다로 옮겨가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랜 유배기간동안 모진 고통을 견뎌낸 다산이 벽계의 절개를 칭송한 글이다. 은자隱者의 생활을 버리고 조정에 출사出仕하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주옹周.을 비판한 공치규(孔稚圭, 447~501)의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사례로 들었다. 불교를 비판했던 다산 조차도 자신을 숨긴 채 범부凡夫 행세를 했던 벽계 정심의 기상을 흠모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혜명은 불교가 번성한 시대라고 해서 더욱 발전하고 면면히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매섭고 시린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견딘 이후에야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일까. 헐값에 함부로 향기를 팔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