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 일선(靜觀一禪, 1533~1608)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정관 일선은 청허 휴정의 대표적인 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흔히들 ‘청허의 4대 문파門派’라고 한다. 이들은 청허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특별한 사상과 수행이 있어 문파의 수장首長이라고 하기 보다는 청허가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수립하였고, 임진왜란이라는 난세를 당하여 시절인연 따라 각자가 행보를 달리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다. 혹자는 청허의 뜻을 받들어 조선불교의 선교학 체계를 확립시키고 대흥사를 그 종원宗院으로 만들었고, 혹자는 임금과 백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전장에서 동분서주했다. 그런가 하면 정관 일선은 어수선한 시절인연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진력했다.
정관의 속성은 곽郭씨이며 충청남도 연산連山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1547년(명종 2년)에 백하 선운白霞禪雲에게서 『법화경』을 배웠고, 후에 청허 문하에서 수행한 뒤 법을 전해 받았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이 없으나, 전란에 은둔해 살면서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임진란이 발생했을 때 정관의 세속 나이는 60에 해당되었다. 전란을 일부러 피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잘할 수 있고 부처님의 혜명을 지키고 이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철저한 수행승으로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수륙재에서 소문疏文을 지어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과 죽은 넋을 위로하기도 하고, 사명 유정을 빨리 산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兩忘知寂其云靜 양망지적기운정
雙照寂知是曰觀 쌍조적지시왈관
互奪靜觀無一物 호탈정관무일물
箇中誰識本眞顔 개중수식본진안
앎과 고요함 둘 다 잊는 것을 정이라 하고
고요와 앎 쌍으로 비추는 것을 관이라 하네
정과 관을 서로 빼앗아 한 물건도 없으니
이 가운데 누가 본래의 참다운 얼굴을 알겠는가
제자인 무경 자수(無竟子秀, 1664~1737)가 스승 정관의 진영眞影에 붙인 찬문讚文이다. 안다고 해서 고요할 수 있지만, 이것저것 헤아리기 쉬워 아는 것과 고요한 것은 조화롭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는 것과 고요한 것 둘 다 잊는다면 그것을 진정한 정靜이라 하며, 그 둘을 비추어 보는 것 또한 관觀이라는 것이다. 결국 정에도 관에도 기울지 않으니 지적하고 말할 만한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제자는 본래의 참다운 얼굴 역시 모른다는 것이다. 스승의 평상시 수행과 교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641년 4월 16일에 유학자 유계(兪棨, 1607~1664)로 짐작되는 시남 창수市南倡.가 지은 『정관집靜觀集』의 서문은 “정관은 스스로 붙인 자호自號이고, 어린 나이에 산에 들어가 도를 구하고,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크게 명성을 드러냈으며 스스로 안개같이 보았다.”고 한다.
일선은 불교의 도가 있는 사람이고, 내가 그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다. 지난 계묘년(1603, 선조 36) 봄, 산을 찾아 속리산에 이르러 선공(禪公, 정관 일선)께서 제자 2백여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대암사大庵寺에서 『법화경』을 강론하고 있었다. 글로써 초청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이르러 머물며 함께 묵었다. 그 용모를 보니 고요하기가 잠자는 학과 같고 그 기氣를 엿보니 편안함이 옛 우물과 같았다. 더불어 말하고 두드리니(.) 그 안에 있는 것은 곧 그 책에 있는 것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긍지가 높아 스스로 기뻐하는 빛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 참으로 공문空門의 노숙老宿이었다.(「정관집 서문 중에서」)
문집의 서문을 지은 이가 정관을 묘사한 부분이다. 용모는 잠자는 학과 같았고, 그 기운은 옛 우물과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경전을 비롯하여 불교에 관련한 여러 가지를 물어보니 막히는 바가 없이 두루 통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추켜세운다고 해서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배우고 닦음이 그의 평생의 일이요, 일상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수행자다운 모습은 사명 유정에게 쓴 편지글에서도 나타난다.
어제 저녁 막하幕下의 승려가 서찰을 가지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는 우리 선사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곧 제 심회를 적어 알려드리려 합니다. 법형法兄은 대장부십니다. 결코 돌의 마음을 지니지는 않았고 소나무와 대나무의 지조를 지녔으며, 검게 물을 들이려 해도 검어지지 않고, 갈아도 얇아지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형산의 보배도 완석에 부딪히면 반드시 갈라지고, 여룡의 구슬도 물결 속에 있으면 빛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되, “비록 삼세제불이라도 오래 진토塵土 중에 묻혀 있으면 본래 신을 모르고 만다.” 하고, 또 옛 성현은 부귀를 뜬 구름처럼 보아 누항에 있어도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고, 유후留侯는 벽곡.穀하고 두 번 상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 몸을 보존할 수 있었고, 소상국蕭相國은 사직을 편안하게 했으나 옥사에 연루되어 죄를 받게 되었으며, 한 대장韓大將은 건원建元의 공을 세웠으나 죽임(誅殺)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큰 이름 아래에서 오래 머물기가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삼가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승려의 거취는 세속의 사람과 다릅니다. 이는 육조六祖가 도를 천하에 전파하였지만 천자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고 승조僧稠의 덕이 일세를 융성하였으나 왕의 부름에 거절하였으나 두 군주는 죄를 더하지 않고 공경함을 더하였습니다. 대개 방외方外의 사람은 방내方內의 예로써 대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듣건대 지금 왜적이 이미 물러갔고 큰 공을 이루었으니 대궐에 나아가 사퇴하기를 청하시려 한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아뢰지 않고 도망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에 사퇴를 알리면 반드시 떠나가기가 어려운 형세가 될 것입니다. 원하옵나니 모름지기 속히 인수를 풀어 비장에게 주어(封付) 궁궐에 이르게 하십시오. 즉각 융복을 벗고 납의를 바꿔 입으시고 깊은 산에 들어가 종적을 끊으십시오.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명아주(비름)를 달여 먹으면서, 다시 선정의 물을 맑게 하시고 거듭 지혜의 달을 밝히시어, 빨리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오르시어 곧바로 보리의 피안에 이르시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빌고 축원하옵니다.(『정관집』 중에서)
긴 편지글은 정관이 전쟁이후에도 전장戰場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명 유정에게 빨리 산중으로 돌아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정관이 본 사명당은 소나무와 대나무의 지조를 지녔으며, 검게 물들이지도,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 대장부였다. 그러나 삼세제불三世諸佛이라도 진흙구덩이에서 오래 묻혀있으면 본래 신을 모르듯이 본성과 본분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관은 사명당에게 산으로 돌아와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명아주를 달여 먹으면서 “다시 선정禪定의 물을 맑게 하시고 거듭 지혜의 달을 밝히시어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 곧바로 보리의 피안에 오르시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빌고 축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사명당 역시 몸은 전장과 일본을 오고갔지만, 마음은 깊은 산에서 시냇물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 선정을 통해 저 언덕에 닿는 것이었다. 암울한 시기를 살다 간 수행자들이 중생구제와 수행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관의 변치 않는 본마음을 알 수 있는 시를 소개한다.
出家須是凡出流 출가수시범출류
一鉢身隨萬事休 일발신수만사휴
物外烟霞心己契 물외연하심기계
人間榮辱意何求 인간영욕의하구
悠悠歲月逍遙遣 유유세월소요견
處處山川自在遊 처처산천자재유
欲何語言知自性 욕하어언지자성
還如撥火覓浮. 환여발화멱부구
출가인은 모름지기 범류를 벗어나
바리때 하나에 몸을 맡기고 만사를 쉬며
세상 밖 안개와 노을에 마음이 이미 물들었으니
인간 세상의 榮辱을 어찌 구하리요
그윽히 세월 소요하며 보내노니
산천 곳곳에서 마음대로 노니네
말로써 자성을 알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불을 헤쳐 물거품 찾음과 같다네
정관 일선이 입적한지 13년이 지난 1621년, 제자 보천普天이 시문을 모아 『정관집』 1권을 세상에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