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영 / 법보신문 기자
지난 7월 부산의 한 지하상가에서 탁발 중인 스님의 머리에 개신교인이 손을 얹고 회개를 강요하는 모습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사건이 있었다.‘ 두타스님의 굴욕’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사진은 인터넷상에서 급속히 유포되면서 이후 일부 개신교인들의 몰지각한 선교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사진이 공개된 한 사이트에는‘개념 없는 기독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창피하다’등 개신교의 광적 선교행위를 비난하는 수천 개의 댓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게시판을 도배하
기도 했다.
‘두타 스님의 굴욕’에서 보듯 취재현장에서 접하는 개신교인들의 광적 선교행위는 이미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빨간 십자가를 짊어지고‘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며 뭇 시민들을 협박하기 일쑤며, 불상을 부수고 단군머리를 떼어내고, 거기에 사찰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대학 불상에 십자가를 새기는 것도 예사다. 무조건적 맹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만 옳고 남의 종교는 모두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 속에는 타인을 위한 어떤 배려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선교 자체를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 이는 종교가 갖는 특성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자 넓게 보면 문화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가필라국에서 시작된 불교나 춘추시대의 작은 노나라에서 시작된 유교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널리 알리고자 했던 의지가 없었다면 한반도에 그리고 지금 이 시대까지 전해졌을 리 없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전도 선언에 각별한 의미를 두는 것도, 수많은 서역의 스님들이 험난한 산맥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던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공존은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내 것이 소중하면 상대방 것도 소중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만이
대립과 갈등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종교는 결국
지탄의 대상이 되고 더 이상 이 사회에 설 자리가 없을 것임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전한다’는 행위에 큰 가치를 두는 것에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고 그로인해 문화가 발전한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공통점의 이면에는 또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불교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그랬듯 기존의 문화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자비와 연기법을 강조하는 불교의 교리적인 특성상 문화에 대한 공존을 지향하면서 불교를 알리고자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는 그 지역에서 분쟁과 분열을 야기하지 않았고 그 문화와 접목해갔다.
이러한 방식을‘플러스 전도 방식’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반대로 기독교는‘마이너스 전도 방식’에 가까울 것이다. 그 지역의 문화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것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형태를 지향하고 또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전도는 대립과 갈등, 심지어 전쟁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조선 중기 이후부터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기독교는 당시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각종 민간 신앙은 물론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제사조차 모두 우상숭배로 몰아붙였고, 대신 오직 예수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강요했다. 이 같은 공격적인 기독교의 선교로 자칫 전통문화의 뿌리마저 뽑힐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했고, 결국 기독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좀 더 확대해서 보면 기독교 역사가‘이단 처단의 역사’라 할 만큼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도 이단문제는 끊이질 않았고 이로 인해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 기독교 내에서는 이단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러한 무리한 선교행위는 한국의 차원을 넘어 해외로까지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억류돼 있는 한국인 인질 문제도 무리한 선교가 원인이 됐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해외 유수 언론들도 이번 문제의 원인을‘선교’로 보고 있으며 이들을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 측도 선교행위자로 보고 있다. 진리를 알리겠다는 사명감이야 높이 살만하지만‘개종한 이슬람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그들의 율법은 안중에도 없는 무자비한 행위라는 비판도 이러한 배경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의‘눈부신’선교행위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파견돼 있으며 3위 영국보다는 무려2배 이상이 많다. 이러한 한국선교에는 성역이 없다. 일본, 중국, 몽골 등, 특히 불교국가가 대부분인 동남아에서 이들의 선교활동은 한 마디로‘거침없이 하이킥’이다.
복지, 교육, 의료를 표방하는 동시에 노골적인 선교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 나라들로부터 문화적인 정체성을 야기하고 분열을 초래하는 이러한 행위를 중단해달라는 요구도 숱하게 받아왔었다. 지난 7월1일 캄보디아 정부가“종교간 갈등을 막아야 한다”며 기독교의 선교행위 금지 명령을 내린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176개국 중 164개국에 매년 1만 4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매년 여름과 겨울을 이용해 각교회에서는 해외 단기선교라는 프로그램으로 수만 명의 선교단을 조직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계는 세계 176개국을 분석, A~C그룹으로 나눠 우선 선교할 국가를 선별하고 있다. 캄보디아, 몽골, 부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등 상당수의 불교국가들이 포함돼 있는 A지역은 선교의 최우선 지역으로 매년 막대한 선교사와 선교단이 파견되고 있는 것으로 전 해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가 계속해서 이 같은 광적인 선교행위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제2, 3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라는 보장이 없다.
인도의 성녀라 불리는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며 한 생을 살다 갔으나 그녀는 단 한 번도 힌두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에 관심을 갖고 종교를 바꿨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형효 명예교수는“전도는 세력 확장이 아니라 본능적 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에 인간을 구원한 본성(신성)을 깨닫게 하는 일”이라며“그래서 석가와 예수 등 참 종교의 교주들은 자가성의 세력 확장을 꾀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세상의 꽃으로 피어나기를 가르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존은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내 것이 소중하면 상대방 것도 소중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만이 대립과 갈등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종교는 결국 지탄의 대상이 되고 더 이상 이 사회에 설 자리가 없을 것임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