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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의 緣

최영종ㅣ수필가

모처럼 삼십년 옛 벗 장형을 만났다.
“최 형, 반갑소. 삼십년 우리우정, 다시 한 켜가 더 쌓이게 되었구려”하는 별난 인사다.
사실 삼십 년 만에 만난 것은 아니고 작년 여름 대천 해수욕장에서 만났으니 겨우 일 년이 됨직하다.

비록 일일생활권 안에 서로 산다고 하더라도 천리 길 넘게 떨어져 있고, 하는 일조차 달라 마음먹고 차에 오르지 않으면 서로 손잡아봄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삼십년을 사귀어온 벗같이 만날 때마다「삼십년」에 힘을 주어 악수 하면서 우리 사이의 우정을 살찌워 가자고 한 것이 이젠 열해도 넘는다.
한동안 막혔던 말문이 서로 터지면서 많은 이야기보따리 속에서 그는 무위(無爲)의 연(緣)을 맺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어보쇼. 나는 며칠 전 지난 낡은 신문 한 귀퉁이에서 기사를 보고는 마음이 씌워져서 시장에 가서 사가지고 찾아가서 건네주고 온 일이 있어요. 나와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무위의 연을 맺은 셈이지요.”하고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말하기에 앞서 나에게 궁금증을 안기려함이 역력하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도 無爲의 緣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위나 연이나 궁극적으로는
무차별, 평등, 불변의 진리인 眞如를 아직껏 깨닫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미망 탓으로 탄하고 싶다.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고 변죽만 돌리니 이런 것이 삼십년 지내온 우리의 우정인가요?’하고 한마디 쏘아붙일까 하다가 참았다.
 그 보다‘무위의 연’도 그렇지만 신문을 보았다. 그리곤 시장에 가서 무엇을 샀다. 찾아가 무위의 연을 맺었다니….
나는 이 스무고개 같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사전을 손에 들었다.
순간 내가 가진 지식이 내 머리 속을 흔들어댄다.
무위의 연…
언젠가 어느 산사의 고승에게서 들어 본 말 같기도 하다. 글자 따라 찾아본다.

무위(無爲)란「1)아무 일도 하지 아니함, 일없이 평온히 지냄. 2)조금도 간섭하지 않음. 3)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임」이라 했으며, 연(緣)에는「연분(緣分)이라는 말과 같이 쓰이며 특히 불가에서는 원인을 도와 결과가 생기게 하는 조건으로서 간접적 원인(Karma Relation). 예하면 벼에 대하여 씨는 인(因)이요, 물, 흙, 온도 같은 것은 연이 되는 것 등임」이라고 적혀 있다.

바로 밑에 연일(緣日)이란 말이 있다.
「유연일(有緣日)의 약어로서 불가에서 인연이 있는 날의 뜻으로 1)사찰의 제일(祭日). 신불에게 인연이 있음의 뜻. 2)중이 되는 인연 있는 날」로 산사에서는 이 연(緣)을 중히 모심을 알았다.
“이러니 무언가 할 까닭 없는 일을 해서 인연을 가진 게 아니요?”하고 정곡을 찌르자, 그는 책갈피에서 스크랩 쪽지를 내민다.
- 감자, 꼭 받고 싶었는데…. 라는 25호 크기의 활자가 내 두 눈을 꽉 붙잡는다.

보다 작은 글씨엔 xx지법 이xx 판사‘도벽청년 스토리’로 화제.‘ 감자로 보답’소박한 말‘못받았지만 가끔 생각나’  그 밑으로는 작은 활자가 원고지 서너 장 분량만큼 들어 차 있다. 스크랩 위를 보니 지난 6월 25일치 xx일보 기사다.
“최 형, 이제 이 사건의 속내를 알겠지요?”
“알겠네요. 헌데 무위의 연이란 무슨 말입니까?”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 기사를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 까요?”하고 다시 한 번 고리를 건다.
“시장가서는 감자를 샀을 것인데….”하고 사려 깊지 못하게 추론(推論)을 내 세우자,
“내가 그 청년 대신 양재동 농산물 시장에 가서 강원도 산(産) 감자 한 박스를 사 이 판사 사무실로 직접 가서 전달한 일이요. 이른바 무위의 연을 지은 일이요.”
“왜 장형이 그 청년 대신 가져다주었소?”
“글쎄 많은 사람들은 최 형 같이 생각 할 것이나,‘ 그 청년이 영영 이 판사에게 감자를 가져오지 않는다면’하고 생각하다가 나라도 가져다주어 세상인심이 메마르지 않았음을 보이고 싶었지요.

그래서‘이 판사님, 나는 사건 청탁하러 온 사람은 아닙니다. 그날의 신문을 보고 강원도 그 청년대신 내가 감자를 가져왔으니 그에게서 받은 셈 치시고 즐겁게 받아주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왔지요.”
이 일이 바로 요즘 그가 한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다시 한 번 파자(破字)해 본다.
무(無)자란「없다. 말라. 금지하는 말」뜻도 있고 할 위의 위(爲)자는「하다. 만들다. 베풀다. 인정하다. 다스리다.」이외에도 다른 많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 장 형 그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으로 인연를 맺은 셈이다.
“장 형, 당신은 미안한 말로 별자(別者)요. 안 해도 좋을 일을 만들어 고생 했구려. 위로 드립니다.”하고 동정어린 지청구를 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도 무위의 연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무위나 연이나 궁극적으로는 무차별, 평등, 불변의 진리인 진여(眞如)를 아직껏 깨닫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미망 탓으로 탄하고 싶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