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피서(避暑)란 글자의 의미로만 보자면 ‘더위를 피하는 일’입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앞에 서는 것이나, 팥빙수 냉면 따위의 찬 음식을 먹는 것도 피서의 한 방편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냉면집이나 냉방 잘 된 찻집에 가면서 ‘피서 간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피서의 의미는 휴가, 요컨대 서양 사람들이 ‘바캉스(vacance)’라고 할 때 담아내는 의미에 더 잘 포개지는 듯합니다. 피하되, 그것이 더위처럼 특정의 대상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프랑스어 바캉스는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뜻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라고 합니다.
최근 저도 ‘피서’를 다녀왔습니다. 한반도 중부지방보다 훨씬 적도에 가까운, 그러므로 서울보다 훨씬 더운 일본 남쪽의 자그마한 섬이 제가 택한 여행지였으니 ‘더위를 피하는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제가 피하고 싶었던 것은 ‘소음’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늘 사람들과 직접 혹은 전화로 대화하면서 이뤄집니다. 그 일을 제 직장이 있는 서울 명동 한 복판에서 해냅니다. 식사를 하려거나 차라도 한 잔 마시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어마어마한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 껴들어야 합니다. 또 제가 밤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집 역시 큰 간선도로와 닿아 있어 제 하루 24시간은 소음에 포위당해 있습니다. 그 성가신 소리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오감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힘들고 훈련을 통해 단련하기도 힘든 것이 청각이라고 하지요. 긴 자동차 여행이 우리를 피로하게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청각의 피로 때문이라고 하고, 인간의 감각 가운데 영혼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것 역시 청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소리나 소음의 반대말은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다만 소리가 어느 정도 소거된 상태를 일컫는 ‘고요’라는 말은 압니다. 음파를 옮기는 매질이 공기이니 완벽한 고요란 진공의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따라서 소리의 반대말은 굳이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진공이고, 공기가 사라진 그 공간은 비(非)생명의 공간일 겁니다. 제가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소음이란, 결국 삶과 생명의 분비물이었던 셈입니다. 제대로 숨 쉬며 쉬고 싶어서, 요컨대 살고 싶어서, 생명의 공간을 벗어난다는 역설! 생을 고해(苦海)라 했던 부처님의 통찰이 거기에도 스며있는 듯합니다.
제가 도망쳐갔던 섬은 과연 아주 고요했습니다. 사람도 적고, 자동차 소음도 거의 없었습니다. 기후가 달라 그런지 서울 한적한 주택가의 낮밤조차 소란스럽게 만드는 매미 울음소리조차 없었습니다. 다만 들리는 것은 빗소리와 바람소리, 사슴과 원숭이 등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다였습니다. 그 고요함에 젖어 저는 제법 긴 내면의 대화를 했던 것 같고, 여행 친구의 말과 표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요함이란 초월의 소리라는 말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옳고 한편으로는 틀립니다. 그것은 육지와 바다가 만나 해안선을 이루듯, 신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닿아 형성하는 경계의 소리인 것 같습니다. 해안선이 실은 선(線)이 아니라 유동하는 면(面)이듯이, 신-인간의 자리가 맞닿는 곳도 선이나 면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저는 그 공간이 지금보다는 훨씬 넓어지고 두툼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일전에 이 지면에 최근 출가한 제 시인 친구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사찰 월간지 ‘海印(해인)’최근호에 출가 수행기를 실었는데 “어색한 행자복을 입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되고 걸을 때는 두 손을 모아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웃어서는 안 되고…, 절집의 법도를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새로 배워나가고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말로 짓는 업(業)에 대한 경계(警戒)는 거의 모든 종교의 공통적 계율인 듯합니다. 일전에 서울 근교의 한 천주교 수도원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수도사들 역시 침묵을 일상화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알찬 피서와 참된 휴식을 갈망하는 많은 이들이 이 계절의 귀한 며칠을 쪼개 템플스테이나 수도원 피정을 떠나는 것도 그 고요를 만끽하기 위해, 신과 인간의 경계에 머물며 내면의 소통을 시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의 글을 읽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괜히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겸허한 자세로 힘써 배워야 할 행자의 몸가짐으로써 말과 웃음을 삼가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스님들, 성직자들은 그 가없는 공부와 수행에 매여 너무 조용하신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 고개가 갸웃거려진 것입니다.
지난 8월 15일, 천주교의 큰 기념일인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정진석 추기경이 축일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마찰과 갈등 원인을 소통의 장애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갈등을 극복하고 참 평화를 만드는 것은 사랑과 정의”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랑은 이해와 수용을 그 바닥 마음으로 품는 반면에 정의는 이해와 수용의 현실적인 토대를 이룹니다. 이해될 수 없는 폭력과 수용될 수 없는 차별을 시정하지 않고, 이해와 수용의 사랑만 앞세우는 것은 위선이기 쉽습니다. 폭력과 차별이 있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며,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되기 힘듭니다. 그리고 폭력과 차별을 넘어 세상을 보다 정의롭게 이끄는 실천의 처음은 바로 말입니다. 소리입니다. 그르다고 지적하고, 고치라고 요구하고, 반성하지 않는 영혼을 꾸짖고 성토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또 역설적으로 우리의 스님들이, 성직자들이, 지금보다 더 말씀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일을 맡아 하시는 원철스님이 최근에 ‘원철스님의 주지학 개론’이라는 부제를 달아 <왜 부처님은 주지를 하셨을까?>라는 책을 냈습니다. 스님은 책에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을 나눠 방장은 이판의 꽃, 주지는 사판의 꽃이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마음을 극복하자고 했습니다. 중국 백운수단(1025~1072) 선사가 남긴 말씀-주지는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지만, 그렇다 해서 날아다니는 것까지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을 소개하며, 절 살림을 맡아 사판승의 일상을 살더라도 ‘공심(公心)’으로 산다면 “그것이 곧 도의 실천이요, 깨달음의 현현이다. 살림 사는 것 자체가 도라는 말이 된다”고 썼습니다. 저는 원철스님의 그 글을 읽으면서도, 묵언을 암묵적으로 중시하는 우리 종교의 관성이 그 형식을 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한 건설적인 발화(發話)의 실천으로 고양되기를 바랐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미국의 세계적 신학자는 2009년 하버드대를 퇴임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정리해 <종교의 미래(The Future of Faith)>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최근에 번역돼 나왔습니다. 책에서 콕스는 21세기 종교의 미래를 낙관합니다. 그는 종교-물론 그는 미국인이고 분석의 근간은 기독교입니다-의 역사를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합니다. 예수 탄생과 사후 300년까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Faith)’의 시대, 성직자 계급이 형성돼 권위를 세우고 신도들의 복종을 요구하며 종교를 교조화했던 ‘믿음(Belief)’의 시대, 그리고 믿음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체의 실천 및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게 된 오늘 ‘성령(Spirit)’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저는 하비 콕스의 글을 보면서도, 종교가 세상과의 접면(接面)을 더욱 넓혀야 미래가 더 밝아질 것이라는, 저의 희망 섞인 생각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고요한 피서지에서 돌아와 다시 대면하는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대비효과 탓인지 며칠 사이 세상이 더 시끄러워진 듯도 합니다. 하지만 어지러운 이 자리가, 견디기 힘들더라도 내가 버티고 서서 해쳐나가야 할 내 자리라는 것을, 내 시간이라는 것을 하릴없이 깨닫습니다. 쉬고 싶을 때 찾아들 고요한 산사도 필요하지만, 바로 지금 제 곁에 여름날의 맑은 바람 같고 청량한 빗줄기 같은 스님들의 말씀이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소음들을 견디기가 조금은 덜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막바지 더위,
다들 잘 이겨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