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 스님
대덕사 주지·동국대 강사
일생을 마음 찾는 공부에만 열중하는 선승(禪僧)들의 심중에는 친절함이 없는 듯하다.
제자들에게 자상한 가르침보다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는 “할!” 을 하고, 화를 내며 주먹을 불끈 치켜드는 일이 잦다.
그러나 선의 진리를 아는 자는 이러한 겉치레를 안중에 두지 않아야한다.
오직 스승의 가르침의 진의에만 더욱 신중해야한다.
스승은 이러한 깊은 진리를 부드럽게, 쉽게 내어 주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이 어렵지만 따르고 의지해야할 뿐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건네주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선수행이 여타 종교의 가르침과 다소 상이한 점이기도 하다.
선이 추구하는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불친절하고 어렵지만 선의 진리는 관념적 질서에 편입되는 허상의 지식이 아닌바, 선은 그러한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지구의 모든 생물을 차별 없이 고루 적신다. 하지만 그 비로 뱀은 독을 만들 테고 매화는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똑같은 법문을 듣는 신도의 마음도 어떤 이는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줄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하품만 나오는 따분한 설교가 될 수도 있다.
진리를 향한 제자의 열정이 없는 한 그 진리는 제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스승은 고함과 주먹 등 갖은 방법으로 제자의 열정을 북돋우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사무침과 절절함, 그리고 정열이 없다면 선가에서 말하는 깨우침의 길도 멀기만 할 뿐이다.
초조 달마대사께서는 쑹산의 소림사(少林寺)에서 대승벽관(大乘壁觀)의 법을 행하고 있었다.
이는 참다운 제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만약 인연이 없다면 홀로 열반에 이른다하여도 어쩔 수 없다는 절박하기만 한 면벽구년(面壁九年)이었다.
그때 마흔이 넘은 혜가가 달마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한다. 달마는 몸과 목숨을 던져야 비로소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며 선뜻 혜가를 거두지 않았다
엄동설한 눈 속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수일을 보낸 혜가는 큰 결심을 하며 마침내 팔뚝을 장칼로 자르고는 몸을 땅에 던지며 진리를 구하고자 신명을 바치겠다고 하며 팔뚝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하얀 눈 위에 떨어지는 아픔에도 개념치 않는다. 이는 선가(禪家)에 내려오는 “설중단비(雪中斷臂)”의 이야기다.
혜가는 마흔이 넘는 불혹의 나이에도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며칠을 견디며 스승의 믿음을 구하기 위하여 팔까지 끊은 “절절함”과 “사무침”이 이었기에 달마대사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달마대사께서는 자신의 제자에게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는 의지력을 시험한 것이며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질로서 “절절함”과 “사무침”을 요구하는 것이다. 절절하고 사무칠 때 고난을 헤치고 수행을 통하여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이 생긴다.
머릿속에서만 생각한 사상이나 이론으로는 결코 팔을 끊는 용기를 지닐 수 없다.
혜가스님이 팔을 자르는 힘이 곧 선(禪)의 생명력이며 불교의 수행이다.
불교의 첫 관문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아만과 아집으로 뭉쳐진 가아(假我)를 버리고 진아(眞我)를 찾는 것이 불교 공부이다.
유약한 중생은 친절한 가짜 중들의 사탕발림에 속아 부적을 사고 참된 불사(佛事)가 아닌 호구책에 솔깃하여 만병통치, 운수대통을 말하는 가짜 수행자들에게 값비싼 수업료를 내지만, 득이 없다. 오히려 업을 지을 뿐이다.
하기사 이절저절 다니며 마구니 짓하는 신도에게 혜가스님처럼 통찰력이 있을까마는 감히 그 스승의 그 제자를 일컫는다면 달마의 제자다운 혜가의 설중단비(雪中斷譬)의 가르침은 매섭다.
달마대사의 제자 혜가를 닮을 수 있는 불자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참된 수행자가 되려니 걸리는 것이 산적하다.
“절절함”과 “사무침”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 여름밤 모기의 생존본능도 수행인을 시험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