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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이 평화의 교사 노릇 헌신적으로 해야

도법스님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상임대표


취재·정리 이권수 / 조계종 총무원


‘자성과 쇄신을 위한 5대 결사’ 중 다섯 번째 평화결사를 주제로 법문한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상임대표 도법스님은 “각자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고마운 존재임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것이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요 진정한 기도이자 참선”이라며 “조계종단의 자성과 쇄신을 위한 평화결사는 불자들이 스스로 평화로운 삶을 살고 다른 이에게 모범을 보이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자성과 쇄신을 위한 5대 결사 중 하나인 평화결사는 내가 가족과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고 나름대로 그 해답을 찾는데서 시작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와 우리 모두의 삶을 평화롭게 하는 출발이자 전부”라고 말했다.
도법스님은 “평화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미움과 화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하는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며 “행복하길 원한다면 죽을힘을 다해 미움과 화를 버려야 한다”고강조하고, “세상이 어려울 때일수록 불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답게 평화의 실천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함께 마음을 모으고 용맹정진하자”고 당부했다.
<다음은 이날 법문 요지>
평화롭기를 희망하십니까? 왜 평화롭기를 희망하십니까? 평화로우면 행복합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출가를 하셨습니다.
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을까요? 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할까요? 간단합니다. 행복하고 싶은 겁니다. 부처님은 출가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고,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치셨고, 그런 노력 등을 통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일생을 바치셨던 분입니다.
그러면, 출가수행을 통해서 이루어낸 평화를 불교적으로는 뭐라고 표현할까요? 열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열반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인간이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평화, 인간이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해도 되는 겁니다.
인간이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려면 평화의 반대되는 싸움과 전쟁을 생각하면 됩니다. 싸움과 전쟁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해야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평화를 희망하고 얘기하면서 싸움과 전쟁이 얼마나 나쁘고 고약한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일기진심수사신(一紀嗔心受蛇身)’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번 크게 미운 마음을 일으키고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뱀의 몸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싸움의 조건은 미움과 화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화를 내면 싸움으로 갑니다. 그게 국가적으로 이뤄지면 전쟁으로 갑니다. 미움과 화가 싸움과 전쟁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과 화내는 마음이 모든 공덕을 파괴한다고 했습니다. 참선한 공덕도, 기도한 공덕도, 염불한 공덕도, 보시한 공덕도, 봉사한 공덕도, 절을 한 공덕도 다 파괴해버리는 게 미움과 분노입니다. 결국 미움과 화에 의해서 싸움이 벌어지고 전쟁이 벌어집니다. 진심이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아주 독하고 고약한 물건입니다. 인생을 아주 추하고 초라하게 만들고 품위 없이 만드는 게 진심이라는 겁니다.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독한 기운이 미움과 분노입니다.
따라서 평화를 희망하고 평화의 삶을 이루고 싶으면 싸움과 전쟁의 절대적 조건이고, 우리의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이 분노가 얼마나 나쁘고 위험한지 사무치게 알아야 합니다. 사무치게 알게 되면 버리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 부딪쳐보면 잘 안 버려집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미움과 화가 내 운명을 쓸모없이 만든다’고 사무치게 인식하고 작심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평화라고 하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하려면 무슨 씨앗을 심고 가꿔야 되겠습니까?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지 않는 한 절대로 평화의 싹은 틀 수 없습니다. 평화의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허구한날 평화타령을 하면서도 씨앗은 미움의 씨앗, 분노의 씨앗, 다툼의 씨앗, 싸움의 씨앗, 전쟁의 씨앗을 심고 가꾸면서 평화의 싹이 트고 평화의 꽃이 피고 평화의 열매가 맺기를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지 않는 한 절대로 평화의 싹은 틜 수 없습니다. 평화의 꽃도 피어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사과의 결실을 보고 싶은데 고구마 씨를 뿌리고 가꿨다고 하면 사과가 열매 맺을까요? 절대 안 됩니다.
사과라고 하는 열매를 거두고 싶으면 반드시 사과 씨를 심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결실을 얻고 싶으면 반드시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죽을힘을 다 해서 심어야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바꿔야 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평화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선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아니하면 인생을 헛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을 붙잡고 가지 아니하면 무엇을 해도 다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과 같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가 어떻게 됩니까? 다 틀려져버립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되는데 이 첫 단추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을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일생을 물어도 과하지 않습니다. 이 물음을 잘 묻는 것이 인생의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한 시작이고 과정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 인생 제일의 화두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거룩한 존재요, 가장 위대한 존재요, 가장 가치 있는 존재요, 가장 완성된 존재요, 가장 신비한 존재요,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얘기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바로 각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겁니다. 각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한다면 ‘내 얼굴이 안 예뻐서 기죽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거나 안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인데 학력이 중학교 밖에 안 되서 ‘창피해 죽겠네’라고 하는 것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거나 안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확신하게 되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부족할 게 없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삼계개고아당안지’, 즉 세상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뭇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이 고통에서 해탈하도록 내 인생 모두를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대자대비입니다.
모든 생명으로 하여금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노력하겠다는 마음을 대자비심이라고 말합니다. 대자비행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왜 그래야 될까요? 나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 모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이것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평화의 씨앗입니다. 이해의 씨앗, 인정의 씨앗, 존중의 씨앗, 배려의 씨앗, 보호의 씨앗, 감사의 씨앗, 이것이 바로 평화의 씨앗입니다. 이것을 보다 더 확고하게 가꾸고 또 가꾸는 것이 바로 평화의 씨앗을 심고 가꾸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보호하고 고마워한다면 아내가 좋아합니다. 웃습니다. 반찬이 맛있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부간의 사이가 좋아지고 가정이 평화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나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므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것을 종단의 일로 연결시키는 것이 평화결사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불교인들은 스스로 평화로운 삶을 살고, 평화에 대해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불교와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한국불교를 위해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부처님 제자답게 평화에 모범을 보이고 평화의 교사 노릇을 헌신적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렵고 위험한 때일수록 평화의 실천자로 평화의 종교를 실행하는 불자로서 우리가 제 길을 제대로 가고 제 역할을 충실하게 잘 할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모으고 용맹정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