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스님
가평 대원사 템플스테이 관장
인간은 태어나서 자기의 삶을 영위하다가 죽음으로서 끝이 난다.
죽음이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때문에 삶이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란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백화도인(白華道人)이라 불리는 서산대사는 이런 유명한 게송을 남겼다.
태어남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겨나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소멸되는 것과 같도다
뜬 구름은 그 자체가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가고 오고하는 것 또한 이와 같도다.
서양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은 그림자 같고 또 짧은 촛불,
아무 뜻도 없는 소리를 격정적으로 소란스럽게 지껄여대는
바보 천치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음의 길을 향하여 걷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는 편작(扁鵲)도 어찌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천하의 명의인 편작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무력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이 한계선상에서 사는 우리는 오로지 ‘나’로서, ‘나’를 찾아야한다.
인간의 인간되는 진실한 권위는 어떠한 조건에 있지 않다. 생生이 허락되어 있는 근본 근거는 오직 하나, ‘생’이라는 근거밖에 또 있을 것이 없다. 어떠한 천재, 어떠한 위인도 그 근거에서는 작은 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 오늘 나는 내 인생을 산다. 찰나의 인생을 살아야하는 우리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가느냐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생의 참 지혜는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만이 아니다. 참 나를 찾는 일이 우선이다. 내가 나의 영혼을 만나는 최초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가운데 자공(子貢)은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졌지만 남이 보기에는 바보 같았다. 불후의 명작 신곡을 쓴 단테는 고향에서 쫓겨난 방랑자였다. 병서(兵書)를 쓴 손자는 앉은뱅이였고 성 프란시스코는 말년에 소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생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석처럼 빛나 오늘날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손님’이라는 시에서 우리네 삶을 이렇게 읊었다.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들을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남김없이 휩쓸어 가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모시어 들여라.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시인의 말처럼 내게 다가오는 모든 손님들을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아차리고 보아야한다.
매 순간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정견(正見)을 팔정도의 맨 앞에 놓으신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한다. 나밖에 따로 주인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다루어야 하나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과거에 있는지 미래에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다.”
사람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을 알아차리고 통찰하지 못한다면 책을 짊어진 당나귀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덕지덕지 덧칠한 여인네의 화장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제 이기적인 지식의 짐을 내려놓고 그대의 욕망과 마주하여야한다. 자기가 만들어 낸 생각과 욕망과 의지를 바라보라. 그것은 그저 잘 짜여진 환상일 뿐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에 대하여 백척간두의 낭떠러지로 떨어져도 괜찮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삶에 대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진정한 믿음은 머리에 있지 않다. 새 옷을 갈아입으면서 낡은 옷을 벗어야 하는 것처럼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려면 명상을 통하여 자기의 생각들을 정확히 알아 내 인생을 바꿀 전환기를 마련하고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 보자.
아는가?
우리의 삶은 올 때도 갈 때도 빈손이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짧은 인생에서 손에 쥘 것들만 생각하느라 마음에는 내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들의 진정한 현실은 물질과 명예, 지위와 성취 이전에 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을 느끼고 얻고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바로 보는 지혜의 눈,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 혜안은 바라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라봄은 지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마치는 날 우리는 무거운 짐 없이 빈손으로 떠난다. 생명의 불꽃이 다하면서 한층 진화된 영혼을 가지고 떠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두 눈은 욕망으로 가득 차 헤매고 있지 않은가? 덧없는 소망과 야망으로 우리들의 영적진화를 위해 아껴 써야할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대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라!
그때 비로소 삶은 진정 존귀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고요히 앉으라.
고요한 가운데 앉아 나를 바라보라.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라. 그대의 모습은 깊은 가운데 빛을 감추고 그대가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그대를 진정으로 바라볼 때 그 빛은 보석처럼 빛난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 가진 에너지를 느껴보라. 바로 소란함이 잦아들고 헛되이 되풀이되는 생각들이 그칠 것이다. 그대의 손과 발, 배와 가슴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에너지를 느껴보라. 그곳에 나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 참 모습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그 거인을 불러 깨우라. 나의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느껴라. 바로 그때, 나의 몸은 참나에게로 가는 하나의 관문이 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과 사고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빛나는 생명의 느낌으로 그 관문으로 들어가 나를 바라보고 알아차리라. 그것은 단지 머리가 아니라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생명으로 내 안에 있다. 우리의 생각은 계곡의 물살처럼 거세게 흘러가고 얼마나 힘없이 휩쓸려가던가. 자기의 생각 속에 길을 잃고 생각의 감옥 안에 갇혀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바보들은 항상 변명만 한다.
“알고는 있지만 시간이 없어”
“나는 정말 너무 바빠”
“다음번에 해볼게”
행동하지 않고 변명만 하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 온 방식을 지킨다는 뜻이다. 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깨어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마음을 바꾸면 나머지는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고요하게 바라보라. 나는 현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라.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가져야할 목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다.
명심하라.
인간은 행복을 찾아 과거나 미래로 분주히 달려가기 때문에 현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음을 바로 알라. 책을 잔뜩 짊어진 당나귀가 되고 싶지 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