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석남사 회주 정무스님
전봉준 
자유기고가
석남사에 주석하고 있는 원공정무(圓空正無) 대종사를 만나기 위해 차를 달렸다.
서운산 자락 석남사로 들어가는 길은 좁았다. 겨우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따라 가다보니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안성에서 유일하게 산과 계곡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행락철이면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아직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을 거쳐 석남사의 일주문 격인 금광루 앞에 섰다. 한글로 된 주련이 보인다.
‘효심 천심 불심 언제나 이마음 수행도 봉사도 나날이 즐거워.’
평소 정무스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법문을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금광루 밑을 통과해 종무소 앞마당으로 갔다. 종무소가 있는 건물에도 ‘우주는 한집안 중생은 한가족 서로 원망말고 은혜만 갚아라’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두 개의 주련 글씨에 정무스님 가르침의 핵심이 다 녹아 있다. 그래도 스님을 뵙기 위해 주석처인 도중당(道中堂)을 찾았다. 소박한 방에 책이 한가득이다.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스님의 출가인연이 궁금합니다.
“나는 1958년 군산 은적사에서 전강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전북대 수의학과를 다니며 은적사에 가끔 가곤 했었는데 거기서 전강스님을 만났습니다. 전강스님은 1957년부터 은적사 주지로 와 계셨습니다. 전강스님의 제자인 송담스님과 능파스님도 은적사에 함께 있었습니다. 송담, 능파스님과는 자주 어울리면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상사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송담스님이 ‘이 선생(정무스님)은 중이 돼야 하는데…’라며 출가를 권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군산 중앙고등학교 야간 국어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자연스럽게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하고 나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출가해 전강스님의 세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전강스님은 어떤 스승이셨습니까?
“전강스님은 경허,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대도인이었습니다. 당대 제일의 선지식이라고 확신합니다. 전강스님 앞에서는 어떤 스님도 함부로 입을 벌리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도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전강스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화두는 어떤 납자가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물었을 때 조주선사가 ‘판때기 이빨에 털이 돋는 것이니라(板齒生毛)’라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한 공안입니다. 이 화두는 1,700개 중 제일 어려운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항상 공부를 챙기셨고 제자들에게도 정진에 관해서는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무스님은 전강스님이 “진짜 무애도인(無道人)이었다”고 덧붙였다. “모든 일에 자유 자재 하신 분이 전강스님”이라며 “재를 지내도 유가족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하셨고, 법문도 대중들의 수준과 열기에 따라 하셨다”고 스님은 전했다.
-행자 이후 공부과정은 어떠셨나요?
“은적사에서 출가를 하고 서울 봉은사로 와 행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봉은사에서
<초발심자경문>과 <법화경>, <금강경>을 배웠습니다. 행자 1년을 마치고 김천 직지사 강원에 갔습니다. 직지사에는 관응스님이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인이 50여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정화불사가 한창이었을 때인데 조계사에 계시던 동산스님이 관응스님에게 학인들을 데리고 조계사로 오라는 청을 했습니다. 젊은 학인들을 정화불사의 동력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산스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촌 출신 학인들이 서울에 와서 공부와 정화불사에 매진하기보다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결국 그렇게 올라간 학인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나 또한 직지사로 다시 내려가 잠시 있다가 삼척 영은사로 갔습니다. 탄허스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탄허스님에게서 <화엄경>을 배웠습니다. 영은사에서 파계사 도원스님과 직지사 녹원스님이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1971년부터 12년 동안 화성 용주사 주지를 하셨습니다.
“영주포교당 주지를 마치고 보은 법주사에서 몇 달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전강스님이 용주사 주지를 하라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전강스님이 처음에는 송담스님에게 주지를 맡겼는데, 송담스님은 선원에서 공부만 하신 분이어서 몇 달 못하고 다시 선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내가 용주사 주지를 맡게 되었습니다.”
용주사는 잘 알려져 있듯이 효행본찰(孝行本刹)이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이 바로 용주사다. 정조는 장흥 보림사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받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은중경>은 부모님의 10가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으로, 부모님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정조는 특히 마지막 10번째 구절인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 대목에서 눈물을 쏟았다. 정조가 훗날 김홍도를 불러 <부모은중경>을 그리게 하는데, 백 살 먹은 노모가 임종을 맞으러 방으로 들어가면서 댓돌 앞에서 뒤따라오는 여든 살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넘어질라! 조심하라”며 지극한 눈빛을 보내는 바로 그 장면이다.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 자식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정조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용주사의 주지를 맡으면서 정무스님은 본격적으로 ‘효’를 널리 알리기 위한 불사에 나서게 된다.
-용주사와 효, 정무스님은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부모은중경>을 통해 열 가지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잉태하여 보호한 은혜, 해산의 고통을 참으신 은혜, 낳고 근심을 놓으신 은혜, 좋은 것만 먹이신 은혜, 마른자리 골라 눕히신 은혜,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 더러움을 씻어주신 은혜, 멀리가면 걱정하신 은혜, 자녀 위해 몹쓸 짓도 하신 은혜, 끝까지 사랑하신 은혜 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를 갚아야 하며, 나는 그 방법으로 다음의 열 가지 효도하는 법을 일러주고 싶습니다.
첫째, 은혜에 감사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성실해야 효도할 수 있습니다. 셋째, 큰 방에 모시고 제때에 봉양해야 합니다. 넷째, 출입시 또는 때때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다섯째, 용돈을 드리되 씀씀이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여섯째, 부모보다 호화롭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일곱째, 인과를 믿고 선법을 행하게 해야 합니다. 여덟째, 자연건강법으로 질병을 예방해야 합니다. 아홉째, 병이 나면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명 때는 절대 울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연과 부모의 은혜만이라도 깊이 느끼고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사람답고 복되고 참된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효’ 법문이 시작되자 스님의 표정은 한결 진지해졌다. ‘정말 진심으로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고 스님은 여러차례 강조했다. 사실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래를 쓴 양주동 선생도 <부모은중경>에 근거해 가사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정무스님은 “부모님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항상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영주포교당에서 진행하던 수련법회의 테마는 용주사에서 ‘효’로 바뀌었다. 스님이 석남사에서 가족단위 수련생을 위해 제작한 1박2일 ‘수련법회’ 책자에는 ‘효도하는 법 10가지’를 비롯해 ‘효도한 공덕 5가지’, ‘불효의 과보 5가지’ 등 효행 매뉴얼이 담겨 있다. 또한 효행을 위해서는 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음주의 36과보’, ‘과식의 5가지 손해’, ‘소식의 5가지 이점’ 등 건강 관련 지침도 적어놓았다. 이와 함께 성불의 장애가 되는 게으름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스님은 깨달으셨습니까?
“못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많이 없어집니다. 깨닫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부하는데 있어 몇 가지 얘기는 하고 싶습니다. 깨달았다는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바로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은 중도(中道)에 의해 깨달아지고 중도는 곧 팔정도(八正道)이고 팔정도는 곧 헌신과 용기, 끝없는 자비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정과 쾌락에 집착하지 않고 법을 위하여 이 몸 바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중도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팔정도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이뭣고’만 생각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만 생각하고 오로지 한 소식 하기만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다면 깨달음은 절대 올 수 없습니다.” 
정무스님은 특히 좌선을 할 때 “스승 없이, 발심(發心) 없이, 눈을 감고 하지 말고 혀를 펴고, 가부좌나 반가부좌의 자세로 하되 시선을 밖에 두지 말아야 하며 화두 없이 망상으로 하지 말라”고 말했다.
-불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그리 따뜻하지 만은 않습니다. 
“우리 불교계에는 아주 나쁜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위(無爲)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입니다. 매일 도량청소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노는 스님들이 많습니다. 둘째는 무식(無識)입니다. 공부 안하는 수행자들도 많습니다. 책이라도 봐야 중생을 제도 할텐데 참 걱정입니다. 셋째는 도식(盜食)입니다. 일하지도 않고 얻어 먹으려 합니다. 이 세 가지만 고치면 불교가 좀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법화행자 5종 서원을 소개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모든 일을 불사로 정성 다하겠습니다. 모든 이웃을 배려하고 봉사하겠습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겠습니다. 모든 환경을 정화하고 장엄하겠습니다.”
스님이 주석하는 방문의 한 귀퉁이에 써놓고 매일 보며 다짐하는 서원이라고 했다. 마치 조계종이 진행하고 있는 수행, 문화, 생명, 나눔, 평화 결사의 내용이 ‘법화행자 5종서원’에 다 들어가 있는 듯하다.
정무스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설명했다.
“기분이야 좋든 말든 기분 좋다 생각하고 기분 좋게 활동하자. 건강이야 어떻든지 건강하다 생각하고 건강하게 생활하자. 행복하든 말든 행복하다 생각하고 행복하게 봉사하자.”
정무스님의 생활법문 한 말씀, 한 말씀이 봄날의 아름다운 햇살처럼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