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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논란으로 어수선한 정국이 정부의 증세 논란으로 더욱 시끄러워졌습니다. 수세에 몰린 정부는 국민의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버르적거리지만 연일 헛발질이고, 제1야당은 촛불시위 여론에 편승해 근원적이고 건설적인 대안보다는 국면의 이점으로 정국 주도권을 줘보려는 속셈이 엿보입니다. 밤낮 없는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짜증은 이래저래 달아오르는 형국입니다.
두 현안은 정치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라는 보편적 정의의 범주로 수렴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사뭇 다른 층위의 문제입니다. 즉 전자前者가 사실에 근거한 엄정한 법의 판단이 요구되는 문제라면, 후자後者는 수요와 공급, 비용과 산출의 함수선 위에서 구성원들의 합의와 선택이 요구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모면하고자 미봉적 수정안을 급조해낸 정부도 못 미덥고, 증세의 불가피성이라는 현실은 덮어둔 채 증세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본능적 저항감에 무임승차하려는 야당 역시 책임 있는 공당으로서의 기대에는 못 미칩니다. 이 폭염의 날씨처럼 증세 문제 역시 쉬이 진정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일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세금은 영토 단위의 근대국가(그리고 지방자치단체)를 지탱하는 물질적 뼈대입니다. 국방, 행정, 복지 등 모든 공적 서비스에는 돈이 들기 마련입니다. 국가가 기업처럼 영리사업을 하지 않는 한 세금을 걷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의 한국처럼 사회적 복지 시스템 강화가 긴요한 현실에서는 증세는 불가피합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또 그 이전에도 세금은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계약에 의한 과세인가, 대의적 시스템 하에서 구성원의 동의에 근거한 세율인가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토지는 물론 나라 전체가 왕의 소유(王土事象)였던 동양 중세시대의 경우 세금은 계약적 의무가 아니라 태생적 숙명이었습니다. 세율 역시 마찬가지여서, 역성혁명을 하지 않는 한 임금이-그리고 관료들이- 정한 세율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근대 이후의 세금 역시 무국적자로 살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세율과 세목 결정 과정에 납세자로서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래서 대의 민주주의의 정치체제 하에서 납세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차 사건 등과 이후 독립전쟁을 통해 식민지 미국이 종주국 영국에 맞서면서 내건 슬로건 즉,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선언은 납세의 의무에 수반하는 의사결정의 권리를 천명한 것으로써, 어떤 학자는 저 구호 안에 근대국가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율 결정의 원칙으로 공평과세 혹은 조세평등주의라는 게 있습니다. 같은 규모의 소득이나 수입이 있으면 같은 규모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으로, 소득의 규모나 계층에 따라 공정하게 세금을 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1인당 동등한 세금을 내는 주민세나 같은 가격의 제품을 살 때 내는 누구나 같은 세금을 부담하는 소비세와 달리 소득세율은 그래서 저마다 다릅니다. 대개는 소득이 많은 계층에 더 높은 세율이 매겨집니다. 계층간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이 모두 시행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전체 세수에서 간접세가 차지하는 비율과 누진세율 등은 해당 국가의 경제민주화 및 복지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등급별 세율과 적용 범위입니다. 정부는 당초 증세 기준선을 연소득 3,450만 원으로 정해 그 이상 소득자에 대해 연 16만 원 정도를 더 걷기로 했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기준선을 5,500만 원으로 상향 조정하고 증세액도 연 2만~3만 원으로 낮췄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식지 않는 까닭은 기준선을 획정한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 논란을 빚었던 법인세 등에 대한 수정안이 없었다는 점, 부족해진 세수증가분에 대한 대책이 없어 복지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는 점 등인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납세자 권리를 정부가 침해한 것입니다.
최근 정국의 소란 속에 색다른 소음 하나가 더 얹혔습니다. 개신교단의 헌금 강제 논란입니다. 전국 교회 1만여 곳 약 300만 명의 교인이 소속된 개신교 최대 교단 예장합동총회가 ‘6개월 이상 예배에 출석하지 않거나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는 교인은 권리가 자동 중지된다’는 내용을 자신들의 헌법 개정안에 추가한 것입니다. 십일조란 고대 유대교 관습에서 유래한 헌금 관행으로, 재산·소득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교단이 밝힌 통계에 따르면 교인 가운데 십일조를 내는 비율은 약 30%로 최근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라고 합니다. 교단 측은 의견 수렴을 거쳐 내년 총회에 개정안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어쩌면 내년부터 헌금을 안 하거나 못 하는 교인은 교회에서 누릴 제반 권리가 사라지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도 기대할 수 없게 된 걸까요? 당연히 반발이 거셉니다. 믿음에도 돈이 필요하냐는 푸념서부터 헌금의 강제는 성경과 배치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물질의 노예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참이라는 비난도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누가복음(11장 42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들의 십일조는 꼬박꼬박 바치면서 정작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태만하기 이를 데 없소. 그처럼 십일조도 마땅히 바쳐야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하오.”
십일조를 안 내면 교인 권리가 박탈된다면 교회에 대한 거액의 배임과 탈세 혐의로 기소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나 횡령 혐의로 구속까지 된 그의 장남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의 교인 권리, 그리고 교회 내 신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조 원로목사는 지난해 한 설교에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권을 고백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물질보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얻은 것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라고도 했습니다.
십일조는 교인으로서의 권리나 의무를 넘어 하나의 상징행위입니다. 10%라는 비율 역시 세금의 세율처럼 협상과 사회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설한 조건 없는 사랑과 커다란 정의에 기댄 선언적 숫자일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강제가 아닌 자발적 헌신의 정신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평신도인 지윤민씨는 자신의 책 <기독교의 거짓말>에서 십일조에 대한 교회의 탐욕을 비판하며 “예언자가 질타한 것은 십일조를 내지 않는 백성이 아니라 십일조를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횡령한 지도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난번에 썼던 종교인 과세는 2015년 이후 소득분부터 제한적으로 과세하기로 실로 40여 년 만에 방침이 정해졌습니다만, 지낸 해 출간된 저 책의 필자는 이렇게 꼬집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특혜를 누리는 직업이 있습니다. 바로 성직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십일조를 잘 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성직자입니다.”
최근 방한한 비교종교학계의 세계적 석학인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기자들 앞에서 종교가 세계적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현실을 ‘종교의 발달 장애’라는 말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표층 신앙과 심층 신앙을 구분하며 “내가 잘 되려고 믿는 표층 신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나쁠 게 없지만 심층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종교의 발달 장애”라며 “대부분의 종교(종교인과 신도)가 현재 종교의 발달 장애를 앓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자리에 동석한 용성선원 선원장 월암 스님도 정법 수행을 통해 감동을 주기보다는 기복적 시줏돈에 의존해서는 제대로 된 불교가 될 수 없다며 사찰 현실을 질타했습니다. 월암 스님은 “종교인이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종교인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씀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정부를 걱정하고, 교인들이 종교를 걱정하는 현실의 중심에, 저 힘센 돈(물질)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