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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無字’ 화두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중국 당나라시대의 선사들이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구호를 부르짖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당시 수행자들이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수행을 소홀히 하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話頭)’를 많이 했다. 그 결과 인도 불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선종’을 세웠고, 이것은 한자문화권에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선종의 이러한 정신도 전통으로 굳어지면서 기성세력화 되어 초심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선배 선사들이 남긴 ‘이야기’에 얽매는 폐단을 낳았다. 이런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송나라시대의 설두와 원오 선사 같은 분들은 당시 선승들로 하여금 선배 선사들이 남긴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하려고, 당나라시대에 꽃을 피웠던 시문학詩文學을 활용하기도 했다.
시문학詩文學을 활용하여 ‘이야기(話頭)’를 ‘강의’하는 풍조는 점점 더 확산되어 중국 문학사 위에 ‘송고문학頌古文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갔다. 그리하여 송나라시대 이후의 선승치고 게송 한마디 읊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이다. 참으로 친절하고 다양하게 화두를 ‘강의’하고 있다. 물론 그 형식은 염拈, 거擧, 송頌, 평評 등 다양하다. 


2.
그런데 문제는, 수행자 자신이 몸소 수행해서, 거기에서 나온 체험을 자신만의 언어로 드러내지 못하는, 소위 ‘작가 선지식作家 善知識’이 되지 못하고, 남들이 남긴 멋진 말이나 또는 기연機緣만을 암송하여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풍조였다. 전등사서傳燈史書를 보면 제방 납자들의 멋진 말을 적어 바랑 속에 짊어진 채, 이리 저리 다니면서 그 말로 수행승을 괴롭히고 현혹하는 객승客僧과 유랑승流浪僧들이 자주 등장하고, 또 그런 선승들을 꾸짖는 이야기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벽암록』의 주인인 원오 선사의 수제자 대혜 종고(大慧宗. 1088~1163)가 스승의 강의 노트인 『벽암록』 필사본에 불을 질렀다는 일화도, 이런 병폐를 염려해서였을 것이다.
대혜 종고는 이 점에 대해서 매우 단호했다. 그는 ‘송고문학頌古文學’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 원오 선사도 “한 화두를 깨치면 천만 화두를 일시에 알게 된다.”고 말했듯이, 대혜 선사가 보기에 사실 화두가 번잡하게 많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쉴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화두의 기능은 족하다. 여기에서 화두의 기능은 일변一變한다. 더 이상 화두는 강의의 대상이나 이야기 거리가 아니었다. 화두의 기능은 ‘의심’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심’을 강하게 유발시켜, 마침내 ‘의심 그 자체’만을 오롯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으로, 화두의 기능을 전환시킨 장본인이 바로 대혜 선사이다. 대혜 선사는 ‘무자無字’ 화두 들기에 매진하는 소위 간화看話의 방법을 강조한다.


3.
남송을 지나 원나라시대로 들어서면서, 대혜 선사의 이런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많은 화두 중에서 유독 ‘무자無字’ 화두에 선사들이 주목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무자’ 화두에 의심을 집중하는 간화선看話禪의 전통이 형성되어간다. 간화선이란, 말 그대로 ‘화두話頭를 관찰(看)하는 선禪’이다. 이들은 ‘화두를 관찰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려고 한다. 간화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방법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땅에도 고려 말 태고·나옹 등의 선사를 거치면서 또 조선의 여러 선사들을 거쳐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에 이르기까지, 이런 간화선이 계승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관찰함(看)’이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참구參究’한다는 말로도 쓰이는데, 화두에 온 정신을 쏟아서 화두에 의심을 사무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화두’는 더 이상 ‘강의’의 대상도 ‘송고문학頌古文學’의 소재거리도 아니게 된다. 오직 ‘의심’을 오롯이 드러내는 수단(또는 도구)이 된다. 이 점에 대하여 대혜 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의심하되 그저 한결같이 의심하여 화두에 대하여 해오던 의심이 풀리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해오던 의심이 일시에 풀린다. 화두가 풀리지 않으면 ‘마치 절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화두 앞에 의심을 세워라.’
만약 화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달리 문자에 대하여 의심을 내거나, 경전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을 내거나, 고인의 공안에 대하여 의심을 내거나,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번뇌에 대하여 의심을 내는 이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삿된 마군의 권속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擧起하는 곳에서 알아차리려 해서도 안 되고, 사량하거나 분별해서도 안 된다. 그저 사량 분별할 수 없는 곳까지 생각해가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지는데, 이것은 마치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바로 가로막힌다는 것을 알게 된다.”<『대혜보각선사서』(제28권) 「答呂舍人」>


4.
‘의심’의 대상은 분명해졌다. 그것은 화두인데, 이곳에서는 ‘무자’ 화두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심하는가? 이것이 궁금하다. 간화선을 하는 이들이 제일 꺼리는 것은 언어나 문자로 ‘사량복탁思量卜度’하는 행위이다. 그러면 왜 저들이 이것을 이토록 싫어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풀어가려고 한다. 우선 인간들의 ‘언어나 문자로 사량 분별하는 행위’를 살펴보자. 인간은 자신 앞에 주어진 실존적이고 즉자적인 ‘사태事態’를 언어나 사유로써 ‘규정’(또는 ‘구성’)한다. 그런데 언어나 사유에 의해 ‘규정’ 되어서 나에게 파악된 것이란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緣起한 것이다. 연기한 것은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다. 물론 언어나 사유가 개인들 서로 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사태 그 자체’와, 언어나 사유로 그것을 우리의 의식 속에 ‘구성’한 것과의, 이 둘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물(水)맛’이라는 글자를 통해서 알려지는 지식내용과 ‘물맛 자체’와는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물의 맛은 마시는 사람마다, 설사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전부 다르게 느낀다. “여인如人이 음수飮水에 냉온冷溫을 자지自知”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위에서 ‘물맛 자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추론의 결과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는 영원히 ‘사태 그 자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각자가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체험한 물맛’ 뿐이다. 인간의 언어나 문자로 자신이 ‘체험한 물맛’을 ‘규정’하는 순간 ‘물맛 자체’와는 간격이 생긴다. 당사자의 직접 체험을 강조하는 선승들로서는, 언어나 문자로 ‘사태 그 자체’를 얽매는 것을 싫어한다.


5.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선승들이 언어나 문자를 싫어한다기보다는, ‘사태 그 자체’에 대한 각자의 구체적인 ‘체험’을 더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설사 부처님께서 하신 체험일지라도, 저마다 자신이 스스로 직접 체험한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는 언어나 사유라는 매개체를 사용하지 말고, 우리 앞에 주어진 (또는 있는) ‘사태 그 자체’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언어와 사유를 사용해온 습관에 젖은 인간들로서는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혜 선사는 말했다.
“마치 절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화두 앞에 의심을 세워라.”
이렇게 하면, 그동안 습관적으로 사용해왔던 언어나 사유가 모두 사라진다. 언어나 사유의 활동이 정지되기만 하면, 인간이 ‘본래적으로 간직한(本有)’ 청정자성淸淨自性이 오롯하게 드러나, 마침내 ‘사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E-mail anand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