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대사 지음
조은자 옮김
<지난호에 이어서>
묘향妙香 스님
주민정朱玟靜이라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저를 대면할 당시 불광산에 다닌 지는 대략 7, 8년 정도 되었고, 키는 크지 않았지만 동작이 민첩하고 여학생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밝고 명랑했습니다.
제가 소임에서 물러난 이후, 저는 불광산의 인사 문제에 그다지 간섭하지 않았고, 모든 인원의 인사이동은 그들의 자유에 맡기고 각 부서의 관할을 존중했습니다. 이렇게 지낸 지 몇 년 후 한번은 불광산의 전등루傳燈樓에서 바닥청소와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그녀를 보고 갑자기 궁금해져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주민정이라고 대답했고, 저는 “오랫동안 불광산을 다닌 것 같은데 왜 아직 출가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서류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해, 출가할 기회가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총명하고 영특한 사람인데, 더구나 불광산에서 수년간 힘들게 봉사도 하였는데 왜 출가 할 수가 없었을까? 그래서 저는 전에 주민정 씨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노점상도 하였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는 등 일과 학업을 병행했으며, 수년간 중환자실에서 간호업무에 종사했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귀찮고 괴로운 일도 잘 인욕하고, 힘든 일도 능히 해내는데다 대학도 졸업하였고, 더구나 간호사 출신이니 우리 불광산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출가하라 권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묻자, 그녀는 “물론입니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흔쾌히 답했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여 지금은 법명이 묘향입니다.
저는 그녀가 했던 노점상, 아르바이트, 중환자실 근무 모두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처럼 근면성실하며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장차 불문에서 수행하면서 고행하고 대중을 돌보는 것을 두려워할 리 있겠습니까?
과연 그녀는 출가 후 줄곧 전등회에서 제자 대중의 승사僧事를 보살피고 협조하는 일을 하는 등 많은 관리업무에 종사했습니다. 간호업무 역시 병행하며 환자 돌봄에도 정성을 다하여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2시간이 소요되는 병원과 불광산을 하루에 서너 차례 오가며 많은 환자들에게 열정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심지어 불타기념관 건축 중에 수도·전기 문제로 곤란을 겪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나서 수많은 수도·전기 등 공사상의 문제를 협력·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출가 생활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그의 성격 덕분에 모든 사람이 그녀를 칭찬하고 그녀에게 감사했으며, 저 역시 제가 내렸던 결정에 안도와 환희를 느꼈습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사의 관리에 있어서는 외모만 봐서는 안 되며, 인품이 있어야 하고, 힘써 배우고 공부해야 하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하며,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고, 널리 선연을 맺도록 노력해야 ‘불광’이라는 단체 안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정 양의 출가를 성취시킨 인연은 저에게는 관리 면에서 제가 아직은 사람을 보는 능력이 있고, 늙기는 했어도 아직 타인을 성취시켜 줄 수 있으며, 또한 제대로 좋은 일 한 가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양자만楊慈滿 사고師姑
양자만 사고(師姑: 여기서는 여성 재가자를 지칭)는 이란(宜蘭: 타이베이 동북 지방) 사람입니다. 민국 41년(1952)에 제가 이란 뇌음사雷音寺에서 홍법을 시작하며 이란 염불회의 회계를 보면서 신도에게서 매월 회비 1원씩 보시받는 것을 맡았습니다. 10년 후 저는 가오슝에서 불광산을 창건하였지만 금전관리에는 재주가 없어 그녀에게 가오슝으로 내려와 회계를 도와 달라 청했습니다. 그녀도 흔쾌히 승낙하고는 서둘러 짐을 꾸려 가오슝으로 왔습니다.
그녀는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당시의 장부관리는 복잡할 것도 없이 기껏해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가감승제加減乘除 정도였습니다. 그녀도 각별히 마음을 써가며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품목들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양자만 사고는 책임감은 매우 강한 반면 업무 처리가 강직한 편이었습니다. 그는 불광산에서 회계를 보며 자금을 결제할 때마다 저를 찾아와 자금 부족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없는 돈을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걸 저도 압니다. 그녀가 발심해서 자금관리를 해주는데 제가 이런 스트레스까지 안겨 주어서는 물론 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매번 그녀에게 어디에 융통할 자금이 있으면 잠깐 돌려쓰는 것도 한 방법이라 이야기하면, 그는 해보지도 않고 “그 자금들은 장차 이런저런 일에 사용할 것이니, 먼저 차용하는 것은 안 됩니다.” 하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저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먼저 가져다 사용하고, 나중 일은 또 그때 다시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급한 불도 앞뒤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늘 고집을 피웠고, 이야기가 이쯤 되면 항상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만 두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양자만 사고가 사명감도 있고 책임감도 무척 강한 사람임을 저도 압니다. 양자만 사고가 그만 둔다고 말하면, 저는 “좋아요. 그만 두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일부러 능력이 안 되는 사람 하나를 들먹이며 관리를 맡긴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다급하게 “그 사람은 이걸 알지도 못하고 할 줄도 모르는데 그건 안 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만 둔다고 하였으니, 사고께서는 더 이상 아무 말 마십시오.”라고 타일렀습니다. 어찌됐든 그녀도 책임감 있고 양심도 있는 사람이라, 매번 안 하겠다고 이야기하고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무턱대고 청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자극해 더욱 분발하게 하는 것이 낫다(請將不如激將)”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녀의 생각에 맞춰 그에게 맞는 처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든지 “안 하겠습니다.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를 타이르거나 설득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도리어 그의 기세만 더 돋울 뿐이며, 저는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니 당신이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책임감도 있고 불교를 위해 발심한 그가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이치를 깨닫기만 하면 발심하여 다시 일을 맡을 것입니다. 불광산에서 수십 년 동안 그녀는 우리와 이렇게 지내왔습니다.
민국 71년(1981), 조산회관朝山會館의 관장을 맡고 있는 소벽하蕭碧霞 사고는 평소 양자만 사고의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양자만 사고의 업무를 보면서, 이미 그가 감당할 만한 수위를 넘어섰다는 걸 알고, 장부를 소벽하 사고에게 넘기자고 권했습니다.
소 사고는 정치대학 회계통계학과를 졸업한 유능한 인재입니다. 회계 관리가 전문 분야이긴 하였지만, 늘 청렴하고 금전 관리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아버지와 자신의 퇴직금 전부를 불광산에 헌납하여 사찰의 공적 자금으로 귀속시키고, 절대 사사로이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이 직무를 맡길 원하지 않아서, 당분간 대리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