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 명조(虛白 明照, 1593~1661)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명조 스님은 성은 이씨, 속명은 계국繼國이다.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다.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정대부 춘문春文, 어머니는 신평 한씨新平韓氏로 훈련원 주부主簿인 승무承武의 따님이다. 스님은 어머니가 이상한 꿈을 꾸고 1593년 11월 9일 태어났는데, 골상骨相이 기이하며 귀가 크고 얼굴 부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마늘과 같은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놀 때도 예불을 하더니 7·8세에 이미 출가할 뜻이 있어 보영普英 스님을 따라 묘향산으로 갔다. 13세에는 사명 유정四溟惟政 스님의 제자가 되어 800명의 스님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계戒를 받았다. 이후 사명 스님이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떠나자 사명 스님의 제자인 인영印暎 스님을 따르면서 선禪을 닦고 불경을 공부하였다. 그 뒤 원준圓俊에게서 화엄대교華嚴大敎를 배웠고, 송월 응상松月應祥 스님에게서 선법을 전해 받았으며, 지리산에 들어가서 무염無染 스님 밑에서 수행하다가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
1626년(인조 4) 후금後金이 국경을 위협하자 조정에서는 스님을 팔도의승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스님은 관서지방에서 의승병 4,000명을 모집하여 평양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훈련시킨 뒤 안주(安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웠다. 스님의 문집에는 당시 심경을 읊은 시가 남아 있다.

綸說飛來募義兵　윤설비래모의병
壯丁紏合四千名　장정두합사천명
江邊只見㫌旗色　강변지견정기색
城上唯聞羽撽聲　성상유문우교성
溝壑塡委誰最恨　구학전위수최한
道塗狼狽我深驚　도도낭패아심경
百祥樓下淸川水　백상루하청천수
長帶餘悲徹夜鳴　장대여비철야명
의병을 모집하란 왕명이 날아와
장정들 규합하니 4천 명이네
강가엔 다만 깃발 색만 보이고
성 위엔 화살 소리만 들려온다
구렁을 메운 시체 누구의 한인가
길마다 앞뒤로 갈 수 없어 내 매우 놀랐네
백상루 아래 흘러가는 청천강 저 물도
길이 슬픔을 띠고 밤새워 울어 댄다

｢정묘년 정월 초하루 의승을 거느리고 안주 대진에 들어가 접전하다(丁卯正月元日領義僧入安州大鎭接戰)｣, 󰡔허백집󰡕 권2

그러나 스님을 음해하는 흉악한 무리들이 끊이질 않으니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스님은 묘향산에 머무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서지방 안찰사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의승병 대장이 되어 관서지방 관민을 동원하고 곡식을 수집하여 군량미를 충당하는 소임을 맡았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1637년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사서 ‘가선대부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복국우세 비지쌍운 의승도대장 등계嘉善大夫 國一都大禪師 扶宗樹敎 福國祐世 悲智雙運 義僧都大將 登階’의 직호와 직첩을 제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스님은 명성과 업적이 더욱 높아져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존경하였다. 당시 승가를 조롱했던 정황을 스님의 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如此魴魚世　여차방어세
頹然臥雲庭　퇴연와운정
朝暮隣猿鶴　조모린원학
春秋伴鶺鴒　춘추반척령
何慮風塵客　하려풍진객
今日扣禪扄　금일구선경
家貧無可賞　가빈무가상
對客玉壺傾　대객옥호경
生涯不須笑　생애불수소
賴此發金熒　뢰차발금형
莫嘲僧與法　막조승여법
儒釋素同衡　유석소동형
君不見　군불견
文公問太顚　문공문태전
一見夢昏醒　일견몽혼성
又不見　우불견
裴休見黃檗　배휴견황벽
喝聲若雷霆　갈성야뢰정
이렇게도 어려운 세상에
구름 덮인 마당에 비스듬히 누웠네
아침저녁으론 원숭이와 학을 친구하고
봄가을엔 할미새가 벗이라네
어찌 알았으랴! 속세의 나그네가
오늘날 산사의 문 두드릴 줄
집이 가난해 내놓을 게 전혀 없어
물병 기울여 나그네 대접하네
이런 삶 비웃을 일 아니니
이것을 힘입어 황금빛 피워 내네
스님과 불법 조롱하지 마시게
공자와 석가는 똑같은 저울댈세
그대는 보지못했는가
한문공이 태전太顚에게 물은 것을
한번 만나 보고 꿈에서 깨었다네
또 보지 않았는가
배휴가 황벽 스님 만난 것을
할喝 하는 소리가 벽력같았다 하였네

｢유생이 스님을 조롱하기에 시를 지어 갚음(儒士嘲僧故以詩賽之)｣, 󰡔허백집󰡕중에서

스님은 그 뒤 금강산·지리산 등을 순례하고, 큰 바닷가와 절과 아름다운 명승지를 두루 편력하였다. 아울러 여러 선원에서 한 철씩 참선을 하거나 불경을 강설하여 후학들을 지도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였다. 그 뒤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머물며 불경을 강의했으며, 만년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여러 스님들이 스님을 모시고 가서 선방의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참선 공부하는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스님은 보현사 사고史庫 옛터에 불영대佛影臺를 짓고 수행하였다. 스님은 1658년 불영대佛影臺에 3년 동안 머무르다가, 하루는 묘향산 여러 암자를 둘러본 뒤 우물물을 마신 후 “나는 이제 가네.”라고 말한 다음 보현사에 와서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69세, 법랍 57세로 열반하였다. 다음은 스님의 임종게이다.

곧 다하였으니 삼계三界도 소멸하고
신령스러운 마음은 만고에 밝도다.
진흙으로 만든 소가 달빛을 경작하고
나무로 만든 말이 풍광風光을 제어하도다

제자들이 화장하여 사리 수십 매를 얻어서 보현사 서쪽에 부도를 세웠으며, 나머지 사리는 금강산·보개산·구월산과 해남 대둔사大芚寺 등 그와 인연이 깊었던 사찰에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다. 스님의 문집에 서문을 쓴 노몽수盧夢脩는 스님의 사람 됨됨이는 “천성이 진실하고 평범하였으며, 계략과 사려는 깊고 원대하였고, 학술은 고명高明하였으며, 동정動靜은 법도에 딱 맞아서 청허나 사명, 송월松月과 비교해 보면 선후가 똑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스님의 시문 역시 “현묘한 이치를 가만히 드러내고 심오한 뜻을 탐구하여 터득하였으며, 바람 속의 구름이요 달빛 아래 이슬처럼 자연 그대로 꾸밈이 없다. 문장은 은근하면서도 간절하고, 강하나 부드러우며, 고상하면서도 웅건하고, 기상이 호방豪放해서 성률聲律에 구애받지 않았다. 또한 균형이 맞아 뒤섞이지 않으면서도 의취意趣는 훨씬 뛰어나고 구법句法이 새롭고 기이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유연悠然히 흘러나가서 스스로 한 가풍을 이룬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스님의 법맥은 청허 휴정-사명 유정-송월 응상-허백 명조로 이어지며,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는 의흠義欽·각흠覺欽·숭헌崇憲·쌍민雙敏 등 수십 명이 있다. 1662년(현종 3) 제자 삼인三印·설해雪海 등이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글을 받아 보현사에 있는 부도 옆에 비를 세웠다. 스님에 대한 지식과 기억은 학자들조차도 아는 이가 드물다. 이분들은 비록 이름이 높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불법을 지키기 위해 본분을 다했을 뿐이다. 우리들이 이 분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스님들 한분 한분이 조선시대 불교의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