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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근과 지혜는 연민심이요 자비심이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월하 노스님께서 85년도에 써 주셨던 게송이 있습니다. 
불현듯 그 게송이 생각나서 먼저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진리무상미언설眞理無相未言說이요,
일체만물무비통一切萬物無非通이로다.


진리의 본질에는 형상이 없습니다. 언어 이전의 소식입니다. 그 본체는 일체 모든 중생과 통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 같아도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대웅전 법당 앞을 지나오다가 제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 그림자는 거울에 비친 정우 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인간은 관념을 통해서 형상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년시절 통도사에 출가하던 모습이 어느덧 70이 넘은 노인의 모습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렇게 56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통도사를 본사로 대중들과 어울림을 가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수행자로 정진하며 살아왔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불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으면 합니다.


무상지상無上之相이 실상實相이요
유상지상有相之相은 허상虛相이니라.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요
염념삼독심念念三毒心이면 처처處處가 삼악도三惡道이니라.


생멸生滅이 없고, 증감增減이 없고, 대소大小가 없고, 장단長短이 없는 경계를 우리들은 본성의 자리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 제법공상諸法空相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그 경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양 없는 모양이 실다운 모양입니다. 그곳이 본성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현상계에 있는 우리는 인식 기관인 육근六根과 인식 대상인 육경六境, 인식 작용인 육식六識을 통해서 각자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보고 듣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바세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모양 있는 그 자리, 모양 있는 그 모양은 생멸이 있고 증감이 있고 미추가 있고 대소가 있고 장단이 있는 허상虛相의 그림자입니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법칙과 생주이멸生住異滅 안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억념憶念으로 보리심菩提心을 지니고 있으면 가는 곳마다 극락정토極樂淨土요 불국정토佛國淨土입니다. 그러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지니고 살면 안락국에 가도 고통과 괴로움일 뿐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보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으면 그 어떤 곳에 가도 삼악도三惡道 아닌 곳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엊그제 십대소년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어느새 이 그림자도 노인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을, 거울에 비친 모습만 보려하지 말고 불빛이나 햇빛에 비친 나의 그림자를 보면서 인생의 경로를 알며 살아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위지안 교수는 ‘나는 너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고 싶다’는 글에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과도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불종자의 씨앗도 건강해야 합니다.
토양이 좋아야 하고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햇빛에 물도 주고 농부의 수고로움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준다는 생각, 줬다는 생각, 받을 것이라는 생각 없이 주며 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이 가져야할 덕목德目입니다.


『화엄경華嚴經』 「십행품十行品」에 “중생들은 내 복 밭이고 선지식이다. 찾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몸소 와서 나를 바른 법에 들게 하는구나. 나는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모든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않으리라.”


『대보적경大寶積經』에도 이르기를, “마음은 바람과 같다. 마음은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마음은 머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 이내 곧 사라져 버린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위대해지지 않아도 참 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는 절대로 위대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삶일까요? 바로 자신이 머무르는 곳에서 근본根本과 이념理念의 도리道理를 다하는 삶입니다. 좀 더 인간적으로 들여다보면, 정직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끝없는 고뇌苦惱 속에서 고통苦痛과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괴로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사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을 모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 시절에 읽었던 『어린 왕자』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 가능하다.”


내 모습을 그림자로 표현했는데 『어린 왕자』에서 말한 지금의 내 모습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청정법신淸淨法身, 원만보신圓滿報身,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입니다. “내가 떠남을 보고 그것을 죽음으로 알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셨습니다.


몸이 아픈 이들 중에는 쩔쩔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습니다. TV에서 장기표 거사의 인터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 긴 시간 민중 운동을 했고 출가해서 스님으로 계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암에 걸려서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그것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아 그분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살아온 시간 뒤돌아보면 미안한 분이 얼마나 있나요? 또 고마운 분들은 얼마나 되나요?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쉼이 없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편안해질 것입니다. 타던 불이 꺼져야 끓던 물이 잠잠해집니다.
불은 타고 있는데 물에게 왜 끓느냐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남의 오장육부에 불 질러놓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려놓고 사는 값진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본생경本生經』에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은 곧 자기의 죽음을 뜻한다.”


부처님께서 “부모에게 받은 이 몸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셨습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대만의 성운 대사님은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어, 세상을 떠나가지만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시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절대 함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위의 죽음을 보면 내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라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와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오면 ‘아이고, 이제 곧 나의 차례가 오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삶에 대한 자기반성이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라는 사실입니다. 삶에는 한두 차례 시행착오를 할 수도 있고 용납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에는 그럴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잘 죽는 일은 잘 사는 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도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가장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자賢者의 모습입니다.


선정 삼매를 닦는 것은 마음이 고요해지기 위함입니다. 지혜를 닦는 것은 의심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의심이 사라집니다. 그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가 가야 할 바라밀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불성佛性을 보기 위함이요, 성품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본성을 본다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無上, 정등正等, 정각正覺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계정혜 삼학을 닦아 삼독을 여의고, 선근과 지혜의 연민심으로 살아가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자의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