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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의 결실은 하루에 있는데


문윤정 / 수필가


가을 햇살이 뜨겁게 대지를 달구고, 과실나무마다 탐스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는 이맘때쯤이면 마음은 괜시리 바빠진다. 서너 장이 채 남지 않은 달력을 아쉬운 듯 자꾸만 넘겨본다. 마음이 급해진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잘 갈무리해야 될 것 같아 할 일들을 적어보기도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몇 년 동안 연초에 일 년의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 계획을 세워도 충실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반드시 겸비해야 하고 한 가지라도 모자라서는 안 된다’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실천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 어느 한 가지라도 그르친다면 별 볼일 없다는 뜻이리라.

서너 장 남은 달력을 아쉬워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무디어 있었던 자신을 뒤돌아본다는 말이다. 연초에 새롭게 시작하는 달력에 담긴 시간들은 유한이 아닌 무한으로 다가온다. 아무렇게나 써도 그 자리에 매양 있을 것 같았는데 손아귀에 힘껏 쥐어 볼 틈도 없이 살같이 가버렸다. 그제야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고 한탄도 해보고 하다가 남은 시간이라도 짬지게 보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어제요, 눈 뜨면 오늘이요, 자고 나면 내일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의 삶은 어제, 오늘, 내일 이 사흘에 달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고 그리고 일 년이 모여 일생이 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은 하루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하루하루가 결국 내 생명을 잠식해버리고 내 목숨줄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이다.
이쯤해서 방거사의 일화를 떠올려 본다.


방거사가 석두스님 회상에서 공부할 때이다. 하루는 석두스님이 방거사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 노승을 만난 이후에 날마다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가?”
그러자 방거사는 “나날의 일을 물으시면 입을 벌려 답할 것이 없습니다.”
“자네의 일상생활이 그와 같음을 내가 익히 알고 있기에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방거사는 대답대신 게송을 하나 지어 바쳤다.


나날의 일은 무엇이라고 할 것이 없어
다만 스스로 슬금슬금 잘도 옮겨가는 구나.
어느 하나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어긋남이 없네.
왕사니 국사니 누가 칭호를 붙였는가?
이 산중은 티끌하나 없는 곳
신통이니 묘용이니 무엇을 말하는가?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이 바로 그것인 것을.


이 게송은 물론 깨달음의 노래이긴 하지만 이 게송 속에는 시간을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꾸짖음이 아닌가 싶다.
특히 마음을 끄는 것은 ‘나날의 일은 슬금슬금 잘도 옮겨 가는구나’ 이 대목이다. 나날의 일이란 것은 우리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일터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그런 일상을 말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간은 ‘지나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슬금슬금 흘러가는 일상 속에 아니 슬금슬금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삶에 대한 정답이 있음을 알아챈다면 일 년의 갈무리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방거사는 게송의 마지막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또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하고 있다. 물을 긷고 나무를 나르는 그것이 바로 신통이며 묘용이라고 한 구절을 난 이렇게 받아들이고 싶다.  ‘생에 있어서 신통이라든가 그런 특별한 것은 있지 않아. 네가 찾고 있는 모든 것은 네가 발 딛고 선 그 자리에 있어. 단지 최선을 다 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 삶이 녹아 있고 우리네 인생이 담겨 있다. 특별한 곳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지 모른다.

특별한 그 무엇이 우리의 생을 변화시킬 것 같지만 결국은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획득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도 눈은 바깥을 향해 끊임없이 내달리고 있다. 그것은 일상에서 삶의 희열을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예전에 권선사는 날이 저물면 반드시 두 다리를 뻗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오늘도 그저 이렇게 헛되이 지나가 버렸으니 내일 공부도 어떨지 알 수 없구나.”
권선사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날마다 하루를 반성하고 장탄식을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삶 또한 날마다 물을 주고 가꾸어가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튼실한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을 채근하고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