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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같은 하루

이진영 / 시인


달포 전쯤 일이다. 오후 한 시쯤 되었을까. 점심을 막 먹고 난 시간이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모르는 번호였다. 의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받았다. 그런데 먼저 신원을 확인하는 말부터 나왔다.
“이진영 고객님 되신가요?”
“그런데요?”
“네, 저는 농협중앙회 종로지점에서 자동화기기를 담당하는 김도훈 주임입니다.”
“아, 네, 그런데요?”
“네, 고객님께서 한 시간쯤 전에 자동화기기에서 현금 5만원을 인출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 순간 나는 무엇이 잘 못된 줄 알고 바싹 긴장했다. 그런데 다음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내 마음을 출렁이게 했다.
“아까 돈을 인출하신 뒤 통장만 가져가시고 5만원은 가지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제야 나는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찾았는데 통장만 가져오고 현금은 가져오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그동안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진 김 주임의 말이 내 마음을 강물처럼 더 출렁이게 했다.
“자동화기기에 있던 5만원을 지금 보관하고 있습니다. 고객님 통장에 지금 바로 입금해놓겠습니다.”
액수의 크기를 떠나 나는 잔잔한 감동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근래 들어 남으로부터 이렇게 크고 소중하고 귀한 배려와 겸손과 아름다운 신뢰를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5만원이라는 돈이 어찌 보면 하루저녁 술값도 안 되겠지만 그 액수가 주는 김도훈 주임의 배려와 겸손과 신뢰는 이 세상에 없는 크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자동화기기를 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김도훈 주임은 그 돈을 그냥 슬쩍 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동화기기를 이용한 고객이 먼저 그 돈을 슬쩍 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름 모를 그 고객이 자동화기기 담당자인 김 주임에게 현금을 가져가지 않았음을 알렸을 것이고, 김 주임은 자신들의 전산망을 이용해 내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를 해주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이름 모를 그 고객이 먼저 감사했다. 그리고 그것을 책임감 있게 처리해준 김 주임과 농협중앙회에 무한한 신뢰가 갔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제 내 자신의 안쪽으로 향했다. 참 부끄러웠다. 사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배려와 신뢰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회색의 도시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가을 하늘처럼 맑은 이 이야기를 내 혼자만의 마음에 담아둘 수 없어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참자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바가바드 기타』는 함석헌 선생이 최초로 번역한 700구절로 된 힌두교의 노래집으로 한글로 옮기자면 ‘거룩한 분의 노래’ 또는 ‘신의 노래’로 풀이 된다. 거기에 ‘참자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노래가 나온다.


  참자아는 칼로 벨 수 없고
  불에도 타지 않으며
  물에도 젖지 않고
  바람으로 말릴 수도 없다.
  참자아는 벨 수도 없고
  태울 수도 없으며
  젖게 하거나 마르게 할 수도 없다.
  참자아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토대이다.
  참자아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며
  인간의 모든 생각 너머에 있어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변화 너머에 있기 때문에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 5만원은 별게 아니다. 몇 십만 원 짜리 카메라도 잊어먹은 적 있고,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소매치기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름 모를 그 고객과 김 주임의 아름다운 신뢰는 눈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같은 ‘참자아’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도 도무지 자기를 속일 수 없는 ‘참자아’. 그러기에 그 두 분은 칼로도 벨 수 없고 불에 타지도 않으며 물에 젖지도 않는 ‘참자아’를 위해 아름다운 신뢰와 배려를 세상에 흘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 모를 그 시민과 김 주임에 의해 나의 통장에 다시 돌아온 5만원의 크기는 값어치로 따질 수 없을 만큼 큰 부피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배려와 겸손과 신뢰를 잃고 회색빛 도시인으로 살아온 내 자신을 뼈아픈 반성으로 몰고 갔다.
그 일로 그날 밤 아내와 나는 책꽂이에서 CD 한 장을 뽑아냈다. 그리고 모처럼 함께 그 노래를 들었다. 콧노래로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마음이 참 맑고 명징해졌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저 하늘에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처럼
  순간을 머물다갈 덧없는 이 한 세상
  부귀는 무엇이며 영화는 무엇인가
  청산이 나를 보고 애닯다 눈물짓네


나와 아내는 그 노래를 리피트로 맞춰놓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나보고도 꼭 그렇게 살라는 다짐으로 들렸다. 노래를 들으며 모처럼 깊은 잠도 잤다. 오랜만에 내 안으로 깊숙이 잠겨본 동화 같은 하루였다.



<발문>
현금인출기에 놓고 나온 5만원이라는 돈이 어찌 보면 하루저녁 술값도 안 되겠지만, 이름 모를 시민과 농협 직원에 의해 나의 통장에 다시 돌아온 5만원의 크기는 값어치로 따질 수 없을 만큼 큰 부피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배려와 겸손과 신뢰를 잃고 회색빛 도시인으로 살아온 내 자신을 뼈아픈 반성으로 몰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