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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백장청규정신

보근스님 / 통도사 농감, 영농법인 사무국장


벌써 벼가 고개를 숙이고 황금물결을 일으키며 가을들녘에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저 멀리 영축산 위로 푸른 하늘은 더 높아지는 듯….


“그래, 통도사는 고추농사가 어떤가?”
“네, 통도사에는 백 근 정도 따서 말리고 벌써 네 물 째 홍고추를 따고 있습니다. 어제 제천에 다녀오셨다는데 제천의 농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좀 땄어! 많지는 않지만 구룡사와 여래사에서 쓸려구 농사를 짓고 있지, 근데 올해는 병이 많아…”
“요즘 기후가 많이 바뀌다 보니 고추농사는 역병, 탄저병, 무름병, 잿빛곰팡이병 등 각종 해충과 병이 많이 생겨 힘이 많이 드실텐데요….”
“그래도 좋은 농사지어 사찰에서 쓰니까 보람이 있지….”


지난 8월에 구룡사에 들러 회주스님과 공양을 하며 나눈 담소입니다.
구룡사 회주스님께서 통도사 주지소임을 맡고 계시던 2008년에 농감이라는 소임을 맡아서 모셨는데, 일 년여 자리를 떠났다가 2011년 다시 통도사에서 농감직과 영농법인의 사무국장 소임을 보게 되어 공무 차 찾아뵈었던 때 나눈 담소였습니다.
『선농일치』와 『생산불교』.
말이란 것은 참 쉽습니다만, 이것을 실천하고 생활에서 행하기는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백장 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 스님으로, 홍주의 백장산에 살면서 교화 활동을 전개한 까닭에 세상에는 흔히 백장선사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당시 중국의 선종에서는 세속과 유리된 독자적인 선원들을 구축하고 그곳에서 승려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선종이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수행의 풍토를 진작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무튼, 백장스님은 아흔이 넘도록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았는데, 고령의 스님이 몸소 농사일을 하시는 모습이 보기에 딱했던지 사람마다 나서서 스님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그런 말들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리다 못해 하루는 스님의 호미를 몰래 감춰버렸답니다. 그런데 식사시간이 되어도 스님이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나서서 이리저리 찾아보니 스님은 선방에 홀로 앉아 참선을 하고 계셨습니다.


“큰스님, 공양시간인데 공양하러 가셔야지요.”
“나는 오늘 하루 일하지 않았으니 먹을 자격이 없다.”


인간에게 노동이 없으면 삶 자체가 무의미하며, 노동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갈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종류나 방법은 다르겠지만 수행자라 할지라도 노동은 필요 요건인 것입니다.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대해서 알아보면,
백장청규는 중국 당나라 때 마조도일의 제자이자 황벽회운의 스승인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가 처음 창안한 것으로, 선문의 수행과 생활규범을 정한 청규입니다. 또한, 선문에서 ‘총림(叢林)’이라는 제도가 백장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백장청규에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구전의 청규 이외에 원문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백장의 문하인 덕휘선사가 제정한 청규 8권이 현전하고 있습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을 불교에서 높이 숭상하여 곳곳에 써서 붙여두고 항상 마음에 새기는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또는 맡은 바의 임무에 따라 자기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곧 진리의 삶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이라는 말과 더불어 사찰의 청규이면서 선생활의 지침이 됩니다.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와서 육조 혜능(慧能)대사, 남악회양(南嶽懷讓)스님, 그리고 중당기(中唐期, 767~829)에 이르러 마조도일(馬祖道一, 769~798)스님이 출현하여 중국의 선종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조스님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하여 사람들의 평상의 마음 생활이 그대로 도의 삶이라는 주장을 외치며 지금까지의 상류층 중심의 선(禪)을 서민층 중심의 생활선(生活禪)으로 구체화시켰습니다.
여기에 소개한 이 글귀도 생활선을 뜻하는 좋은 예입니다. 그 후 마조스님의 제자인 백장회해스님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선수행의 도량이 만들어지게 되어 생활과 선이 하나임을 몸으로 체현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총림(叢林)제도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선생활의 지침서인 백장청규도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청규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곧 여기에 소개한 만고의 명언 ‘일일부작 일일불식’입니다.
마조 한 사람 아래서 무려 139명의 도인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중에는 신라에서 온 스님들도 있으니 마조야 말로 선종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고 호칭에 조(祖)자가 붙을 만합니다.
그런데 제자인 백장도 스승에 버금가는 공을 세웠으니, 바로 선종의 살림살이 규칙을 정한 것이 그것입니다.
백장은 청규를 만들어 선종 스님들의 직책이나 역할을 정해 위계질서를 세우고 거처의 용도를 정해 절도있는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원칙을 강조하며 입적할 때까지 이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이런 백장의 노력으로 그 동안 더부살이 해오던 율종의 사찰로부터 독립된 공간과 살림살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814년 백장이 입적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845년 불교는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이라고 불리는 탄압을 받게 됩니다. 당나라의 15대 황제 무종은 도교의 열렬한 신도였는지라 평소 다른 종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다가 32살이 되던 해에 무종은 불교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는데 4,600개의 절을 헐어버리고, 26만여 명의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로 인해 불교는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지만, 선종은 피해가 없다시피 할 정도로 멀쩡했다 합니다.
이는 선종의 스님들이 산 속에 살며 자급자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모두 백장선사의 덕분입니다.
선종이 무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무종이나 대신들이 선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당시 황제나 고관대작들은 권력자를 우습게 알고 죽음을 겁내지 않는 선사들을 보고는 두려움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제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말입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선문규식(禪門規式)”이라는 아주 짧은 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문규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법당(法堂)이 선원(禪院)의 중심이 되어 있는 점입니다. 선문규식에 따르면, 백장회해 선사는 불상(佛像)을 모시는 불전(佛殿)을 짓지 않고 오직 설법(說法)하는 법당만을 세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불국사에 가면 불상을 모시지 않은 무설전(無說殿)이라고 하는 법당과 통도사에 설법전, 일반적으로 대웅전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불전이 도량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을 두고서 스님들은 이렇게 걱정을 하였습니다.
“불전을 짓지 않고 법당만을 세웠다고 한 것은 선문규식에서 말하고 있듯이 불조(佛祖)가 친히 불법(佛法)을 위촉하고 그 법을 이어받은 주지(住持)가 수시로 상당(上堂)하여 법을 설하므로 주지야말로 불조와 다름이 없는 지존(至尊)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 주지가 그에 합당한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주지가 비일비재한데 어느 스님과 신도가 주지를 불조와 같이 신(信)하겠는가.”라고  전했다 합니다.
구룡사 회주이신 정우스님께서 통도사에서 주지로 재임하시던 당시 영농법인을 설립하셨고, 또한 자신이 유용할 수도 있는 충북 제천 소재의 운주암에 속해있던 농지 2만여 평을 판단이 흐려지기 전에 통도사의 영농법인에 등기해서 통도사의 재산으로 남길 것을 뜻만 세우신 것이 아니라 곧바로 실천하셨을 때 공심을 갖춘 그 모습이 이 까마득한 후배의 가슴에는 잊혀지지 않을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백장청규” 란 거창한 말보다 소박하게 자연환경에서 실천하는 생활, 오행을 느낄 수 있는 삶의 공간인 농지에서 백장스님으로부터 1200여년이 흘러온 현재 농사를 통해 『선농일치』와 『생산불교』를 실천해 보고자 통도사 농지를 오늘도 둘러보며 가을의 풍성함에 가슴 뭉클합니다.


스님!!! 구룡사 회주라는 높으신 자리, 통도사 전임 주지라는 상사의 지위가 아닌 은사스님 같은, 사형 같은 선배님처럼 상추쌈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해주셔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어느 때에 제천 운조암에서 상추에 쑥갓올리고 밥 한술 넣어 풋고추 된장에 찍어 한입가득 행복한 미소 머금을 스님의 용안을 떠올리며, 통도사 농막에서 저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