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아시다시피 아랍인과 유대인의 상호 반목과 증오는 해묵은 역사적 맥락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영토’라는 현실적인 이해의 상충도 엄연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십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가자 지구 등 몇몇 분쟁지역에서 두 민족이 견지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의 양상은 비합리적입니다. 난민촌의 영구 평화를 보증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든 군사평화를 위해서든 양측 모두에게 득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의 대립과 분쟁, 테러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마치 가문끼리 대를 이어 사생결단 피의 대결을 벌이는 중세시대 배경의 소설 한 대목을 보는 듯합니다. 그 와중에서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라는 해답 없는 논쟁으로 자신들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합니다.
이 양상을 알베르토 바스케스 피게로아라는 스페인 출신 작가는 그의 소설 <우리 모두 잘못이다>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만약 그들 중 아무에게나 당신의 눈 하나를 빼내는 대가로 당신의 적을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제안한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할 것입니다. 또 그들 중 아무에게나 재산을 주되 그들의 적에게는 두 배의 재산을 준다고 하면, 그 제안은 단호히 거절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작품 속 화자에게 상대가 “그렇다면 이런 안 좋은 상황은 언제나 끝나게 될까요?”라고 묻자 그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떠한 연유에서건 유대인들이 사라진다면, 우리(아랍인)들은 미워할 대상을 갖기 위해 서둘러서 우리의 신앙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게 될 겁니다. 그들(유대인)의 경우도 우리와 같을 겁니다. 인간이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면, 종교가 증오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모든 종교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리가 ‘이웃이 아닌 자들을 배척하라’는 증오의 지침으로 변질된 예가 역사 속에 너무나 허다하기 때문에 저 소설 속 화자의 냉소 어린 발언- 종교가 증오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을 비웃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9·11테러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진 뒤 미국의 목사 테리 존스는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을 공개 소각합니다. 그 일이 화근이 돼 아프간 주재 유엔 직원들이 테러로 희생됐고 아프간의 반미 시위가 격화되기도 했습니다. 테리 존스 목사는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도 “잘못한 게 없으니 뉘우칠 것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미국 개신교단의 대표자가 아니고 종교의 대표자는 더더욱 아니지만, 인간이란 작은 사례를 통해 전체를 판단하는 우매함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럼으로써 옹졸한 이해가 옹졸한 저항으로 이어지고 또 그럼으로써 증오는 관성의 동력을 얻어 악순환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9·11 테러 발발 만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사건 이후 강산이 한 차례 바뀌는 동안 미국 사회, 나아가 국제 사회가 감당해야 했고 또 감당하고 있는 아랍인과 이슬람교도 일반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증오의 부피는 어마어마합니다.
올해 초 국내에도 개봉한 인도출신 감독 카란 조하르의 영화 <내 이름은 칸>은 아랍인과 이슬람교 신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과 증오가 어떻게 인격과 가정을 파괴해 나가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천재 자폐아 ‘칸’은 미국 사회의 이슬람교인으로 살아가지만 세상의 폭력적 편견으로 가족을 잃은 뒤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야겠다는 절박한 바람으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갑니다. 그는 어떤 자리에서건 또 누구를 만나건 마치 간절한 기도문처럼, 전형적인 자폐아의 태도와 억양으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
영화에서 칸의 어머니는 자폐아인 칸에게 세상과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칼을 든 사람은 나쁜 사람, 사탕을 든 사람은 좋은 사람이란다. 칸,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이 단순한 가르침이 과연 바람직한지는 더 따져볼 일이지만, 적어도 종교나 인종, 민족의 이름으로 편을 나누지 않는다는 점에서 칸은 민주적으로 양육되는 셈입니다. 그런 칸의 입장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바라보는 미국 사회의 시선은 억울할 따름입니다. 그 억울함은 곧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핵심적 가치를 잃어버린 미국 사회, 나아가 국제사회에 대한 항변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최근 들어 기독교에 대한 폄하와 증오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고, 목사를 ‘먹사’라 조롱하는 글이 인터넷 공간 속에 즐비하다고 합니다. 급기야 한국교회언론회(대표 김승동 목사)라는 곳에서 지난 8월 논평을 내고 대형 포털사업자 및 네티즌들의 자제를 요구하고 한국교회의 적극적 대처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 논평을 읽고 알게 됐는데, ‘개독’이란 1992년 인터넷 PC통신 대화방에서 처음 등장해 현재까지 확산된 반기독교주의 용어라고 합니다. 논평에 따르면 기독교 용어에 대해 악의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무려 70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지난 7월 26일 유명 포털사이트측에 기독교를 악의적으로 모독하는 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인터넷업체들의 협의기구인 한국인터넷자율기구는 ‘기독교인 정치인 등은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객체가 될 수 없다’ ‘특정 게시물을 지정하지 않고 요청하는 포괄적 삭제는 자율기구의 정책규정에 따라 인정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말(표현)이 사라진다고 현상이 극복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말을 탓하기에 앞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성찰과 그에 따른 근원적인 처방이 필요할 것입니다. 급기야 최근 일부 말 많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주축이 돼 다시 시동을 건 듯한 기독교정당 창당 움직임도 옹졸한 대립과 증오의 맥락 위에 놓인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합니다.
물론 자성의 목소리가 범(凡)한국 교회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돼 온 것도 사실입니다. 2007년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동문 6명이 공동 집필해 펴낸 책 <개(開)독교를 위한 변명>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20대 젊은 필자들은 “왜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로 욕하는지 근본 이유를 따져보니 교회가 하나님은 오직 내 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한국 교회는 세상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교단끼리도 서로 귀를 막고 산다. 개독교를 열린 ‘開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썼습니다. 한기총 대표회장 금권선거 파문이 한창이던 지난 4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에 발제자로 나선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손인웅(덕수교회) 목사는 “원칙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원칙은 성경인데 지도자들 중 성경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개탄했고, 오정호 대전새로남교회 목사는 “돈을 받고 목회자의 양심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리는 사람들은 주님과 신도들의 신뢰를 반역한 것이며 이로써 국민들로부터 ‘개독교’라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다”고 발언했습니다.
사안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전체를 재단해서 매도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아랍과 유대의 갈등에서 보듯, 대립과 증오의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증오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해입니다. 사랑은 그 이해의 토양 위에서 싹틉니다. 그것이 곧 모든 종교의 뿌리일 것입니다.
소설 <우리 모두 잘못이다>에 나오는 이런 구절을 우리는 반성적으로 거듭 읽어야 할 듯합니다.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무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자라면 사람들은 뿌리를 보고 그 나무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알아봅니다.”
썩은 열매는 어떤 나무에나 맺히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