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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에게

승한스님 / 봉담선원장


누이야.
오늘 문득, 출가하기 전 너와 다퉜던 일이 생각나 이 편지를 쓴다.
욕망과 감각에 눈멀었던 그 시절, 내 마음은 왜 그리도 오욕칠정에 불탔던지,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절로 회한의 눈물이 솟구친다.
누이야.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정겨운 말이냐. 지극히 사소한 일로 너와 그렇게 다툰 뒤, 지난 몇 십 년의 세월은 번뇌와 고통의 날들이었다. 왜 그렇게 다투었던지, 그만한 일로 왜 내 몸에 불을 질렀던지, 정말 그땐 내가 아니었다. 나의 나가 아니었다.
누이야.
너도 알겠지. 가까운 사람이 주는 아픔과 상처일수록 더 크고 깊다는 것을. 남이었으면 진즉 잊고 지워졌을 일이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물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사실, 그 때 너와 내가 한 핏줄만 아니었다면, 그만한 일로 그렇게 억장이 무너지도록 싸우지는 않았을 게다. 아니, 그 일이 설령 그렇게 막중하고 지대한 일이었다손 쳐도 손위인 내가 조금만 더 넓고, 깊고, 멀리 생각했다면 그렇게 절연까지 가는 다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게 다 내 아집과 탐심과 빗나간 자존심이 빚어낸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아픔의 부메랑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때 그 상황에선 너는 네가 최선이었고, 나는 내가 최선이었다. 그런데도 우린 그 때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최선임을 주장하며 어리석게도 천륜마저 어기려든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단 해밀턴의 『용서』라는 책자는 나에게 그 같은 자각을 더욱 깊이 심어주었다. 단 해밀턴은 그 소책자에서 S. I. 맥밀란이라는 의사의 말을 인용해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노예가 되고 만다. … 나의 마음을 꽉 틀어쥐고 있는 그 강압적인 손길로부터 피할 도리가 없다. 음식점 종업원이 내 앞에 큼직한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갖다 놓을 때에도 … 그것은 다 말라비틀어진 빵과 물밖에 없는 식사와 별반 다를 게 없게 된다. … 미움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은 내가 그 맛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미움은 마치 부메랑과 같다. 미움은 제 자리로 돌아오면서 처음에 표적으로 삼았던 사람 대신 우리들 자신에게로 와서 꽂힌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악영향을 미치는 소행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 누이야.
해밀턴의 지적처럼 너와의 다툼이 있고 난 뒤, 나는 너무도 오랜 날을 미움의 노예로 살아 왔다. 다시는 뇌리에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너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나는 숱한 밤을 불면으로 시달려야 했다. 정말 송곳처럼 아픈 고통이었다.
그 뒤로 언제부턴가 나는 내 이름자 대신 ‘우전愚田’이라는 자호自號를 남몰래 사용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밭(愚田)’인가를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최고인 줄만 알고 (시건방지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그렇게 부끄럽고 어리석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못난 오라비의 출가의 변이라고 해두자.
누이야.
이쯤에서 어쭙잖은 내 편지의 본론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우리나라 불교계의 원로 중에 김재웅 법사라는 분이 계신다. 그 분은 자신을 따르는 불자佛子들에게 ‘금강경 독송’을 지도하며, 여섯 가지 ‘마음 살림살이 법’을 가르치고, 또한 몸소 그 여섯 가지 ‘마음 살림살이 법’을 실천하며 사시는 분이다. 그 여섯 가지 ‘마음 살림살이 법’ 가운데서도 나는 다음 네 가지 ‘마음 살림살이 법’을 참 좋아한다.
첫째,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라.
둘째, 남의 허물은 덮어주고 내 허물은 남의 허물처럼 파 뒤집는 마음을 연습하라.
셋째, 남의 허물이 보이면 그게 곧 내 허물인 줄 알라.
넷째, 누가 뭐라든 ‘예’ 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라.
그래. 누이야.
김재웅 법사의 ‘마음 살림살이 법’처럼, 내가 그 때 너를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조금만 연습했더라면, 한 피를 나눈 남매끼리 그렇게 오랜 날을 고통과 아픔으로 살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네 허물보다도 내 허물을 조금만이라도 더 크게 보는 마음을 연습하고 살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날들 미움의 노예가 되어 살진 않았을 것이다.
누이야.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보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연습하고 산다면, 우리 주변에 만연한 성폭력 사건도, 살인 사건도,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쟁도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대통령이 되겠다고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고 헐뜯고 짓밟는 일도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또한 남의 허물을 내 허물로 보고 남의 허물을 내 허물처럼 덮어주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연습하고 산다면, 학교폭력은 물론 작금의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우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참, 누이야.
기독교도인 너로서는 누구든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라고 하면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네가 믿는 종교에 따라 부처님 대신에 누구든 상대방을 예수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고 살면 된다. 물론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면 부처님 대신에 마리아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면 부처님 대신에 마호메트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고 살면 될 것이고 말이다.
누이야.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좀 있으면 온 산천이 단풍잎으로 붉게 물들겠지.
푸르렀다 붉어졌다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의 섭리처럼 우리 올 가을에는 서로의 미움과 분노의 부메랑을 낙엽처럼 먼 곳으로 날려버리자.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고향 산천 가까운 곳 어디쯤으로 단풍놀이라도 가면, 못난 이 오라비에게도 꼭 기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