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길을 가리키다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신비를 캐다가 불교 진리를 탐구한 이시우(76) 서울대 천체학과 명예교수가 <직지심경>을 풀이한 <직지, 길을 가리키다>(민족사 펴냄)를 썼다. <직지심경>은 <직지심체요절>을 줄여 부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임을 입증한 금속활자본인 책은 고려 말 고승 백운화상이 과거칠불과 인도의 28조사, 중국의 110선사들의 선문답을 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직지심경>은 선불교적으로만 접근돼왔다. 선禪은 스스로 직접 마음을 보도록 이끈다. 따라서 논리나 지식이나 해설을 경계한다. 직접 마음을 보면 곧바로 그 자체로 부처가 된다고 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문자로 써 복잡하게 하지 말고), 직지인심(直指人心·직접 마음을 보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직접 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이 교수는 선서禪書를 논리적으로 해설했다. 그가 <직지심경>을 풀어낸 논리는 불교의 핵심인 연기론이다. 연기緣起는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선서에 대한 논리적 해설은 전통적 선불교엔 반역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오직 주위 세계와의 관계를 외면한 채 오직 내면의 마음만을 보게 해 독불장군식 깨달음만을 지향하는 일부 선승의 풍토에 대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저자는 서울대 천문학과 대학원을 나와 미국 웨슬리안 대학교에 천문학 석사과정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관측천문학 박사를 마치고 경북대와 서울대에서 천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신비를 캐던 그는 불교에 빠져들었다. 불교에 심취한 그는 정년을 5년 앞두고 불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서울대 교수직을 조기퇴직하고 출가를 결행하려 했다. 그러나 조계종이 정한 출가 정년 연한이 넘어 출가하지 못하자 1999년 부산의 한 사찰에서 안거(3개월간의 참선)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일부 선승들의 권위적인 모습을 보고, 2개월 만에 안거를 중단하고 돌아서 홀로 불교를 탐구했다.
그는 연기론을 체득하면서 일부 선승들의 권위의식이 다른 존재와의 연기적 관계를 무시한데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선불교에서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히자만, 다른 존재와의 연기적 관계가 무시되는 자유는 오히려 권위의식을 지닌 아상의 표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자유는 연기적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독립적인 존재란 없기에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고,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연기적 관계로 얽혀 있는데도 자기중심적인 절대적 주체를 찾으면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대경무심對境無心이라고 해 외경을 경시해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우주 만유는 서로 독립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에 얽매여 있다. 그러므로 마음은 항상 외물을 대상으로 해서 일어난다. 만약 마음이 외물에 무관하게 일어난다면 이것은 상상이고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불법과는 무관하게 되므로 타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는 “사람이 곧 부처”라는 인불人佛사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연기론적으로 보면, 우주 만중생과 생명은 평등하며 모두가 부처다. 이를 깨달으면 인간 중심의 오만이 깃들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주위 모든 사람과 자연물까지 부처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모든 종교가 무조건적 신앙이나 기원, 기복 그리고 내세의 편안한 삶을 바라는 데만 몰두할 뿐 자연이 어떻게 훼손되고 병들어 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또한 실질적인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불교는 타 종교와 달리 과학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마음속의 막연한 주관적 정신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는 “영속적 깨달음만 고집한다면 연기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아상이나 증상만의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사실 인간의 의식과 인식은 극히 제한적이고, 인간은 지구라는 작은 시공간 속에서 찰나적으로 머물다 사라지므로 인간도 우주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생명체와 동등한 삶의 가치를 지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겸허함으로 만물과 타인을 부처로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만 집중하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외물과의 연기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천초목과 일월성신이 모두 법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바라제 존자처럼 먼제에도 법성이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불사상으로 유아독존에서 벗어나면 나만이 아니라 주위의 하찮아 보이는 사람과 생명은 물론 불행과 죽음까지도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연기적 논리를 통해 조사들의 선문답을 깨닫도록 안내한다. 가령 ‘귀종 선사가 부젖가락으로 솥뚜껑을 두드리는 소리를 냈을 때, 이때 무엇을 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때 소리를 듣는 것은 일어난 결과를 아는 것이며, 소리를 나게 하는 행위엔 소리가 없다고 한다. 현상계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 본질을 놓친단다. 그러므로 현상을 일으키는 작용 즉 행위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귀종 선사가 솥뚜껑을 두드리는 행위는 현상과 본질 사이의 연기적 관계를 나타내 보였다는 것이다.
또 조주 선사가 말한 ‘뜰 앞의 잣나무’와 주관적인 마음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외경 모두 부처임을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부처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외부 대상에서 부처의 불성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일부 선승들이 절대나 순수, 완전 등에 매몰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런 것은 환상 속에만 존재할 뿐 실재에는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조작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동그라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돌멩이가 계곡 속에서 물결에 휩쓸리고 쓸리다보면 완전한 동그라미가 아니더라도 저마다 둥글둥글해진다. 나만이 주체고 나머지는 모두 객체가 아니라, 그 완전하지 않은 그 본연의 자연물들이 모두 부처다.”
그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 모든 만물이 부처임으로 일깨우고 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우리와 관계 맺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하나 같이 나와 다름없이 귀중한 부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