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호
연세대학교 의료공학 박사과정
일산 여래사 신도
우선 ‘독毒’ 이라는 한자를 찾아보면
‘독, 해독害毒, 해악害惡, 해치다, 죽이다, 근심하다, 괴로워하다, 괴롭히다, 미워하다, 원망怨望하다, 한탄(恨歎·恨嘆)하다, 개탄(慨歎·慨嘆)하다, 거칠다, 난폭亂暴하다, 다스리다, (병을)고치다’ 입니다.
‘독’ 임에도 불구하고 ‘다스리다, 병을 고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자 사전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해석입니다. 부정의 의미와 더불어 적절한 독을 이용하여 더 큰 독을 없애는 긍정의 의미를 부여 한 것은 우리나라 조상님들의 지혜로 비롯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중국에서 발행한 사전(중한, 중영)에는 긍정의 의미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독심毒心’ 이라는 말 또한 한자사전이 아닌 국어사전에 ‘독살스러운 마음/악독한 마음’으로 표기 되어 있을 뿐, 중국 사전에서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따라서 ‘독’의 부정적 의미와 한자사전에 독심이 없음을 고려하면, ‘삼독심’이란 우리의 마음을 해害하는 세 가지 근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의미하는 탐진치는 언제나 화나는 마음을 초래합니다. 자신의 그릇된 탐진치로 말미암아 화禍를 자초하였어도 ‘화’나게 마련입니다.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그렇게 화나는 순간, 피를 뽑아 1cc를 물에 희석하여 토끼에게 주었는데, 무려 50마리가 즉사卽死하였다는 실험 보고서를 접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독毒 입니다. 불가佛家에는 심화돈발心花頓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의 꽃은 한 순간 만발한다’는 뜻입니다. 기쁨, 슬픔 그리고 화, 마음의 변화를 꽃에 비유한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감정(꽃)은 자극과 함께 한 순간 극極에 달합니다(만발). 그런 연유로 우리의 감정은 하루 안에 극락과 지옥을 세 번 오간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이 그러한 독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릅니다. 그 순간 독이 생깁니다. 독사毒蛇에 물려도 독이 퍼지는데 시간이 필요하건만, 우리의 몸은 탐진치로 만들어진 독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순간 온 몸의 피를 독으로 바꿉니다. 한 순간입니다. 그 많은 독은 긴 한숨으로 들이키는 산소와 더불어 간장肝臟의 활약으로 해독解毒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잔뜩 화를 내고 나면 졸음이 옵니다, 온 몸이 노곤하지요? 극도로 힘들어진 간의 회복을 위하여 뇌腦는 때 아닌 멜라토닌을 분비시키고 이내 우리는 스르르 잠들고 맙니다. 이런 횟수가 잦아지면 몸에 잡병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탐진치가 강한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관상觀相 지식이 없어도 우리는 이야기 합니다. “어머~ 저 사람은 욕심이 많은 가봐”, “ 그 사람은 성질이 못되게 생겼어” 무엇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 하나요? 얼굴의 피부입니다. 욕심 많고, 화禍를 자초하거나,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사람의 공통점은 피부가 거칠고 두껍게 마련입니다. 피부색이 검 붉게 변하기도 하지요.
왜 그렇겠습니까? 간이 너무 많이 혹사 한 것입니다. 해독解毒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간장肝臟의 성능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피에는 늘 잔 독이 남아 있게 됩니다. 그 잔 독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원리로 작은 자극에도 발끈발끈 화가 나게 마련이어서 상황은 더욱 악화 됩니다. 이른바 면역입니다. 항-바이러스를 의미하는 NK 면역지수와 관계없이 반복적인 신구의身口意의 방식에 물들어 갑니다. 그것을 우리는 습習이라 하지만 생리학 및 심리학에서는 이 또한 면역이라 합니다.
그런 구조적인 연유로 화를 자주 부리는 사람은 성내는 그 기준점이 일반인과 다릅니다. 본인 입장에서는 화내는 것이 마땅한데, 남들이 보기에는 화 낼 정도가 아니란 말이죠.
이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탐진치’입니다.
탐진치를 거두어 내기 위하여 ‘탐진치’를 간단하게 분석해 봅니다.
탐심貪心
우선 탐貪 위에 있는 ‘이제 금今’을 풀어 봐야겠습니다. 금今 = 합할 합合 + 미칠 급及 입니다. 합할 합合에서 밑에 있는 口가 생략되었고, 금今 밑에 있는 ㄱ 자 처럼 생긴 것은 미칠 급及의 약식입니다. (미칠 급 = 어떤 결과에 미치다, 영향을 끼치다, 그렇게 되다) ‘이제 금今’은 무엇을 합하여 무엇에 미치는가? 과거, 이 전의 내가 한 모든 것, ‘나와 만난 모든 것이 합하여 지금의 ‘나’라는 모습에 영향을 주었다’ 입니다. 따라서 ‘지난 날 나의 모든 행위, 업적 들이 합해진 것이 지금 나의 어떤 상태를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모든 결과의 합이 지금이라는 의미입니다.
‘탐애’는 ‘다른 사람이 내게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곧, 일 하지 않고, 본인의 수고로움 없이 뭔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으로서 매우 나쁜 생각입니다. ‘절도’ 또는 ‘강도’에 버금가는 생각이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중죄重罪인 것입니다.
진심瞋心
‘눈 부릅뜰 진瞋 = 눈 목目 + 참 진眞 입니다. 옳은 것(자연의 진리와 도리)을 못 미더운지 다시 돌아보는 것, 눈을 부릅뜨고 보는 것입니다. 진眞은 단어의 앞에 놓여, 뒷 단어의 옳음을 강조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진眞’이 개별 단어로서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옳다, 맞다, 도리, 진리, 자연 그리고 천연 등이 그것입니다.
도리와 진리, 특히나 자연과 천연을 의미하는 ‘진眞’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눈을 부릅뜨고 오히려 성낸다고 하면, 뭐가 잘못된 것이죠.
사람이 그러한 행위를 할 때는 보통, 이성을 잃은 상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옳은 것을 옳게 못보고, 그른 것을 그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러함을 불가佛家에서는 번뇌煩惱라 합니다. 흔히 짜증이나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 원망 등으로 인한 괴로움을 번뇌라 하지만 이것은 삼고(三苦 : 行苦, 壞苦, 苦苦)를 의미하는 것이며, 명확한 의미의 번뇌는 ‘대상을 그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요인’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냄의 반대 격인 즐거움, 들뜸도 번뇌입니다. 들뜸 또한 옳지 못한 판단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번뇌를 없애려면 번뇌의 명확한 의미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화나고, 성내고, 이성을 잃고, 사리 분별이 모호한 상태, 그래서 진瞋은 성내고 화냄을 의미합니다.
더불어 마음의 부정적인 변화, 마음의 물듦(정情)으로 인한 감정의 변화, 그릇된 변화 들, 긍정의 변화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옳고 그름, 긍정과 부정의 분별 그 자체가 감정의 변화 입니다. 안정되지 못한 감정이라는 관점에서, 들뜨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절대 값(Absolute value)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정된 감정, 물들지 않는 감정을 0 이라 할 때, 긍정이라면 (+), 부정이라면 (-) 일 것입니다.
예컨대, + 3 이든 - 4든 간에, 각각의 절대치는 3 과 4이고, 중요한 것은 0 이 아니라는 점에서 물든(情)상태 인 것입니다.
성공한 사업가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 는 금물, 일이 잘된다고 들뜨고 웃고, 일이 안 된다고 화내고, 성내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감정의 변화,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바로 진瞋 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이 영원할 듯 생각하며 들뜨고 미래를 설계 합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이 영원할 듯 침울하고 화나고 불안해합니다.(그러다가 병이 날 정도로...) 생즉필멸生卽必滅, 즐거움도 슬픔도 끝이 있습니다. 시간은 모두 지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순간은 매 순간 과거로 돌아갑니다. 쏜살같이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의 경치를 보며, 내 것 네 것을 따지는 것과 꼭 같습니다. 지혜는 안정된 감정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은 감정의 기복 없는 평온한 나날이 되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치심癡心(痴心)
어리석을 치痴 = 병질 엄. + 알 지知 입니다. 유사한 의미로서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글자를 아는 것이 화를 부른다는 의미로서, 지식이라고 쌓아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병’, ‘우환’을 의미하는 병질 엄. + 지식을 의미하는 알 지知는 많이 안다는 것이 때로는 삶에 걸림돌이 되어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결정할 때 오목조목 꼼꼼히 따지고 또 따집니다. 그렇게 고려하는 기반은 지식입니다. 자신이 지식을 기반으로 꼼꼼히 고려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신중히 고려 한 것이 망칠 때가 있습니다. (의외로 자주 망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는 지식, 학식이 아닌 분석된 경험과 지혜로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왠지 그것을 잘 못합니다. 지혜가 아직 찾아오지 않아서...
인간이 밝혀낸 이론들은 실제 사실에 약 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이라는 것은 실제 지식의 4%라는 의미 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아는 것은 자기 업무에 관한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직업이 20000개 넘는다는데, 4%를 20000으로 나누면, 0.0002% 그 나마도 다 알지 못합니다. 자기 직업에 관한 지식을 100%아는 사람은 없으므로, 약 20% 알고 있다면, 결국 우리가 아는 것은 0.00004% 입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빈약한 숫자, 그 지식을 바탕으로 뭔가를 결정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그런 빈곤한 지식으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불안, 위태위태 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의 동체대비라는 불가의 가르침으로 지혜를 얻어서 생각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식에 눌려서 보이지 않는 지혜, 지혜를 찾아서 하루속히 혜안을 가져야겠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머리로 생각 했습니다. 생각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꾸 연습해야 합니다. 마음을 가꾸고, 마음을 씻고, 자기 마음을 찾고,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겁니다.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고요하게 사색하고 명상하면 무엇을 선택하면 좋은지 떠오릅니다.
이런저런 이론들에 얽매여 생각한 결과보다 훌륭한 결과가 가져다줍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리석을 치痴는 ‘단순하게 아는 것’, 그렇게 아는 것을 기반으로 ‘뭔가를 꾀하려고 하는 것’, ‘그러함이 병이고 그 병의 이름은 어리석음이다’ 가 아닐까요?
탐진치와 번뇌의 명확한 이해를 통해 새로운 싹이 뿌리 내리기를 간절히 발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