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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 독서에 필요한 간편한 도구 『선문수경』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선 관계 문헌을 읽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독서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지만, 선사들의 문답이 실린 선 문헌을 독서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여기에 그런 고민을 덜어 줄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한다. 조선 후기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스님이 지은 『선문수경禪文手鏡』이 바로 그런 책이다.
‘선문禪文’이란 선 관계 문서 또는 문헌 자료라는 뜻이고, ‘수경手鏡’이란 손거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제목에서 보여주다시피, 선 관계 문헌이나 문서를 읽는 데에 필요한 간편한 도구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하고 화장을 하기도 한다. 그렇듯이 이 작은 책을 도구로 사용하면 선 관계 문헌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선 자체를 논하려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선 자체가 아닌 선을 바라보는 ‘기준’을 제시한 사람은 일찍이 한국 독서계에도 잘 알려진 중국 당唐나라의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이다. 규봉 선사는 ‘선의 근원(禪源)에 관한 이런저런 말들(諸詮)을 수집해서 그에 대한 전체 서문(都序)’을 썼다. 이 책이 바로 『선원제전집도서』이다. 필자가 보기에 백파 선사의 『선문수경』도 역시 이런 해석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2.
중국의 규봉 스님은 『법집별행록』에서는 물론 『도서』에서도, 당나라 시대의 우두종, 그리고 북종과 남종, 남종 중에서 다시 홍주종과 하택종의 논리를 분석 비판했다. 반면에 백파의 『선문수경』은 송나라 시대 이후 공안公案을 주무르던 선불교의 큰 스님들의 염拈·송頌·거擧·평評과 그리고 찬讚·화話·창唱·화和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규봉은 100권이 넘는 당대의 선 관계 문헌을 몸소 수집해야 했지만, 백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고려의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 스님이 『선문염송집』(30권)을 편집했고, 구곡 각운龜谷覺雲 스님이 『선문염송설화』(30권)를 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책은 조선시대 최고의 책으로 취급되었다. 백파 스님 자신은 이미 그의 나이 50대 시절 『선문염송집사기』(30권, 5책)와 『선문오종강요사기』(1권)를 손수 지었다. 이런 방대한 자료들을 서가에 구비하고, 백파 스님은 선 관계 문헌들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 한 권만 잘 읽으시면, 선 관계 문헌을 읽기가 많이 쉬어질 수 있다. 동국대출판부의 배려로 필자는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해서 2012년 출판했다. 자세하게 출전을 달고 많은 주석을 활용하여 용어를 우리말로 해설하기도 했다. 나름 쉽게 읽히도록 노력했으나, 독자들께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3.
백파 스님은 임제의 법통을 계승하는 조선시대의 승려들이 그렇듯이 ‘임제의 3구’를 소재로, 제1구를 ‘조사선’, 제2구를 ‘여래선’, 제3구를 ‘의리선’으로 각각 짝을 짓는다. 그러면서 백파 스님은 ‘조사선’을 최고로 친다. 여기서 말하는 ‘조사’란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 달마(?∼495) 대사를 지칭한다. 그러면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무엇을 전하려했다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보통 ‘마음의 법(心法)’을 전하러 오셨다고 한다. ‘마음의 법(心法)’ 대신 다른 말로 ‘열반묘심涅槃妙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의 법’은 ‘진공이면서도 묘한 상태(眞空妙有)’로 작용하는데, 이것을 전하는 방식의 적합성에는 상중하의 층차가 있다는 것이다. ‘진공묘유의 상태로 작용하고 있는 마음의 법’을 백파 스님은 ‘무늬 없는 도장’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고 얼마나 고스란히 체험하는가에 따라 최상급인 ‘조사선’도 되고, 최하급인 ‘의리선’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진공과 묘유인 마음의 법’이 무엇이기에, 이것을 흠결 없이 있는 그대로를 체험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이 ‘진공과 묘유’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백파의 선사의 사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4.
논의를 좀 더 촘촘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용어를 보다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묘유妙有의 의미는, 오묘한 상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뜻한다. 즉 실체론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오묘한 상태로 있는 ‘있음’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공眞空의 의미는, 참된 공한 상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뜻한다. 즉 허무론적인 의미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상태로 없는 ‘없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공이면서도 묘하게 존재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본래면목이고,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것’을 훼손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최고의 선禪 수행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은 모든 중생이 생래적으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독자들은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백파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진여’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자는 것이다.
‘화엄교학’에서나 ‘간화참선’에나 궁극적인 목표는 ‘진여’를 손상시키거나 왜곡시키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각자가 ‘체험’하자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물론 ‘염불정토’도 그렇다. 다만 다른 것은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이 다를 뿐이다. ‘길’이 다를 뿐, 또는 ‘교통수단’이 다를 뿐, 가려는 ‘목적지’는 똑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까? 몸이 그럴 수 있을까? 아니다. 마음의 작용이 없으면 육체로는 지각활동은 물론 인지활동도 불가능하다. 결국은 ‘마음의 작용에서’ 또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진여’를 체험한다.
그런데 중생들의 ‘마음의 작용’ 속에는 ‘무명’과 ‘진여’가 ‘서로를 상호 포섭(相攝)’하고 있다. 이런 마음의 구조로 인해서, ‘진여’가 움직이면, 그에 수반하여 ‘무명’도 따라서 움직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의 작용’ 속에는 ‘진眞’과 ‘망妄’이 혼융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의 작용’으로 ‘진여’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선에서는 ‘무념無念’해야 한다고 한다. ‘무념’이라는 용어 대신, ‘남종선’에서는 ‘무심無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그것이 가능해지는가? 그 방법의 모색에서 ‘간화참선’과 ‘화엄교학’은 서로 다른 길을 택하게 된다. 남종선은 송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무심’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화두’를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화두’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었지만, 『벽암록』이 만들어지던 북송 시대에 이르러서는 100칙則으로, 『무문관』이 만들어지던 남송 시대에는 48칙으로, 시대에 따라 선택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무자화두’ 하나로 집중되었다. ‘무자화두’를 관찰하는 방법을 통해서 일체의 사량분별을 쉬어, ‘무심’의 상태가 되면 ‘진여’만이 오롯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백파 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진여를 손상시키거나 왜곡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수행이다. 백파가 보기에 임제종의 간화선 가풍만이 그런 수행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백파 자신도 그런 전통을 선양하겠다는 것이다. 백파 선사는 비록 ‘화엄의 종가집’에 태어났으면서도, ‘화엄교학’ 보다는 ‘간화참선’의 방법으로 무념·무심을 체험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태토는 스님이 저술한 『법보단경요해』에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많은 화두 중에서도 ‘간화看話’의 대상으로는 ‘무자화두’에 집중했다.


anand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