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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 영관(芙蓉 靈觀, 1485~1571)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부용은 벽송 지엄의 제자이자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과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스승이다. 벽계 정심이 지켜 낸 한국불교의 법맥이 벽송 지엄에게 전해져 그 명맥과 함께 선교학禪敎學의 기틀이 세워졌다면 그것이 부용 영관에게 역시 전해졌다. 부용은 걸출한 제자들을 키워내 한국불교가 사방으로 전해지는 기초를 만들었다. 조선후기 불교를 중흥시킨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가 그들이다.


高踞覺地 先引三車 고거각지 선인삼차
張羅八海摝群魚 장라팔해 로록군어
金搥擊碎 虎穴魔宮 금추격쇄 호혈마궁
人亡世寂 月落天空 인망세적 월락천공
높은 깨달음의 자리에 걸터앉아
먼저 세 수레를 이끌어
팔해에 그물을 펼치고
많은 고기를 끌어 올리더니
금방망이로 호랑이 굴과 마군의
궁전을 쳐 깨트리니
사람 없는 세상은 고요하고
달이 진 하늘은 비었다.


제자 청허가 스승 부용의 진영眞影에 읊은 찬탄이다.
부용의 성품과 생애를 가늠할 수 있는 흔적이다. 우선 스승을 따라 공부하여 그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에는 몰려오는 수많은 제자들을 제접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은 고요함(寂)과 텅 빈 하늘(空)만 남을 뿐이었다. 수행자와 스승의 역할을 했을 뿐 그는 다시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부용은 법명이 영관靈觀이고, 호는 은암선자隱庵禪子 혹은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고 한다. 1485년(성종 16)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집안 살림이 넉넉했지만, 대대로 미천하여 예절이 바르지는 못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때문에 당연히 삶이 거칠었을 것이고, 출세의 욕심 또한 누구보다 많았을 것이지만, 부용의 삶을 보면 예상 밖이다.
기록은 그를 “몸은 비록 이 세간에 머물렀지만, 생각은 늘 서방西方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거주하는 방을 부용당芙蓉堂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나이 여덟 살 때 아버지와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고는 아버지가 화를 내며 매질을 하자 “사람이나 물고기나 목숨을 부여받은 것은 똑같고 고통을 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한 것이나 돌을 세워 부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모래를 올려 공양이라 하기도 하며 눈을 감고 꿇어앉아서 해가 지는 줄 모른 것을 보면 불법佛法과 지중한 인연이 있었다. 부용이 어릴 때 지나가던 스님이 “이 아이는 출세간의 보배요 세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부디 출가시키기 바랍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부용은 나이 13세 되던 해(1497)에 집을 나와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행하는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지 3년 만에 머리를 깎았다. 이후 부용은 여러 해를 선지식을 찾았고, 9년 동안 구천동九泉洞으로 들어가 홀로 정진하기도 했다. 그동안 신총信總법사에게 교학의 강령을 탐구하였고, 위봉威鳳대사에게 선禪의 요체를 배웠다. 1509년(중종 4) 용문산에서 조우祖愚대사와는 선에 대해 토론하고 그 여가에 『노자』와 『장자』까지 섭렵하여 그 수행의 깊이를 더해갔다.


공연히 소림少林을 생각하다가 시간만 낭비하니
우물쭈물 하다가 귀밑털만 하얗게 세었네.
옛날 비야리毘耶離의 소리와 냄새도 없고
마갈타摩竭陀의 메아리 소리도 없다.
말뚝으로 능히 분별하는 뜻을 막고
어리석음으로 반드시 시비하는 마음을
막는 것과 같다.
짐짓 망령된 헤아림으로 산 밖을 나니
온종일 속세를 잊고 푸른 산을 마주한다.


부용이 1519년(중종 14) 금강산 대존암大尊庵에 이르러 읊은 율시다. 오랜 세월 내 주머니에 보배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산천을 헤매고 스승을 찾아 떠돈 것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봄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집에 돌아와 보니 봄은 이미 내 집에 있었고, 붉게 핀 매화가 코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부용은 붓과 벼루를 불사르고 입을 닫은 채 묵묵하게 앉아서 9년 동안 정진했을 뿐 간혹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이 시를 가리키기만 했다고 한다. 그동안 장부일대사를 터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배웠던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모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경전과 『노자』·『장자』와 각종 유가경전은 부용이 저 언덕으로 가는 뗏목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던 것이다.
부용의 시절에는 불교계가 선禪만이 최고라든가, 교敎만이 최고라고 하여 갈등과 대립을 키워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흔히들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잘못 이해하여 부처님의 말씀인 교학은 선 수행을 위해서 마땅히 버려야 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과 교가 어찌 둘이겠는가. 설령 선을 우위에 두는 경우가 지배적이라고 할지라도 깨침의 완성은 선과 교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교학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있다. 경계할 일이다.
1519년(중종 14) 부용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뵙고 지리산으로 향하였다. 훗날 그가 법을 이어 받은 벽송 지엄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벽송은 1520년(중종 15)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고 정진했다. 오늘날 함양 벽송사碧松寺다. 벽송은 이때부터 성품과 도량은 더욱 넓어지고 풍채와 지혜는 더욱 밝아졌다고 한다. 입산入山이후 벽송은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외부와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아첨하지 않고, 불법佛法을 세상에 팔지 않는다고 하여 동시대 수행자들로부터 거만하다고 비방을 받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벽송이 부용을 쉽게 받아 주었겠는가. 예부터 인연 없고 받을 그릇이 못되면 주고받지 못하는 것이 불법佛法 아니던가. 부용이 “영관이 먼 곳에서 스님의 법풍을 흠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부디 거두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자 벽송이 “영靈도 감히 올 수 없거늘 관觀이 어디로부터 왔단 말인가.” 하고 되받아쳤다. 거절의 표시다. 그러자 부용은 벽송에게 합장하며 “청하옵나니 대사께서 살펴보시옵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할테니 쓸모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라는 정중한 부탁인 것이다. 벽송은 마침내 “다듬어 볼 만하구나.” 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지엄대사가 스님 마음에 가득 끼인 안개를 걷어내고 끓는 바다 같은 욕망을 말끔히 씻어주고 부처님의 지혜를 쏟아 부어 주니 스님의 20년 묵은 의심은 마치 커다란 골짜기에 겹겹으로 쌓였던 얼음이 한꺼번에 녹듯 풀렸다. 스님은 곧 지엄대사 앞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연이어 찬탄하면서 “참으로 제 스승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청허 휴정이 정리한 부용의 행장 가운데 일부분이다.
깨침에도 시절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20여 년 동안을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터득하기 위해 잠못 들게 했던 번민을 순식간에 해결했던 것이다. 부용은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부용은 스승 벽송이 세상을 떠나고 3년 후부터 그를 찾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천문과 의술뿐만 아니라 『중용』을 품안에 안고 『장자』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의문난 점들을 풀어주었다. 걸출한 유생儒生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호남과 영남의 선비들 가운데 삼교三敎에 통달한 이들은 모두 부용에게서 배웠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부용은 8도를 다니며 그의 보따리를 풀어 제자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었다. 스승 벽송의 뒤를 이어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불교를 지켜낸 것이다.
1571년(선조 4) 마침내 부용 영관은 세납 87세, 법납 72세로 사바세계를 떠났다. 시자 법융法融·영응靈應과 대선大選이었던 정원淨源·신옹信翁, 선덕禪德이었던 진기眞機·도의道義 등이 스님의 영골을 수습하여 연곡사燕谷寺의 서쪽 산기슭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