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 인터넷 선방「구도역정」대표
단풍이 한창인 요즘, 쌀쌀한 날씨에도 명산대찰의 기도처에는 가족과 지인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기도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복을 비는 기도[祈福]’에만 불자들이 머문다면 올바른 신행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목적과 결실은 그 정도로만 한정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깨달음의 한 방편으로서, 수행의 입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 기도를 통해 특별한 수행의 경지를 이루게 됨은 물론이요, 도를 깨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수행의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은 기도로서 수행의 기틀을 다지기도 한다. 수행자의 첫 마음은 너무나 순수하고 완전히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그 효과 역시 크고 빠르기 때문이다. 업장을 녹이고 신심을 북돋울 수 있는 기도로 수행의 기틀을 올바로 정립하면 깨달음의 여정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예로부터 기도의 힘으로 수행의 기틀을 다진 고승들은 주로 천수대비주 기도나 관음기도, 문수기도 등으로 득력해 본격적인 참선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참선 용맹정진에 앞서 21일, 100일 기도를 결제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은 것은 기도가 참회를 통해 업장을 녹이고 신심을 북돋울 수 있는 수행의 기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천수대비주 기도나 관음기도, 문수기도 등으로 득력(得力)해 참선 수행의 길로 나아간 고승들이 적지 않다. 또 이미 기도로 득력한 스님들은 단기간에 견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 선조 때의 선하자(禪荷子)스님은 묘향산 문수암에서 100일간의 관음기도를 회향하는 날, 포수가 쏜 총소리를 듣고 확철대오 했다고 한다. 경허 스님의 수제자인 수월 스님은 글을 몰랐지만 오직 천수대비주 기도를 통해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어떤 경전을 들어도 뜻을 꿰뚫게 됐다고 전한다. 천수대비주를 10만번 외운 용성 스님은 기도를 마친 후, 스스로“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불과 엿새 만에 견성하였다. 숭산 스님은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가“바위,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처럼 기도가 삼매를 이뤄 오랜 시간 지속되면 곧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도를 하면서 힘이 드는 줄도,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묘한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관과 객관이 하나된 상태에서 모든 상대적인 경계와 시비ㆍ분별, 생사마저도 초월하는 무심삼매에 빠져들면
마침내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일타스님은“기도가 꿈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일념삼매에 젖어들게 되면, 깨달음의 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스님은 < 기도> 라는 책에서“의심도 나지 않는 화두를 들고 마구잡이로 씨름하기 보다는, 스스로 마음을 정하여 업장을 녹이고 신심을 북돋울 수 있는 기도를 한바탕 열심히 하는 것이 장래의 수행에 훨씬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구도의 여정에서 한번이라도 좌절을 겪지 않은 수행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럴 때 마다 불자들은 간절한 기도로 초발심과 신심을 다지고, 수행의 장애물을 돌파해 나가야 한다. 수 십년 동안이나 정진했건만, 질기고도 질긴 습기(習氣)의 발동으로 좌절을 겪는 수행자들은 반드시 이러한 기도를 통해 원점에서 수행을 재점검하고 새롭게 발심할 필요가 있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전생과 금생의 업장이 소멸되어야 지혜의 눈이 열려 수행이 제대로된다”고 하였다. 그렇듯이, 수행의 입문자나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도모하는 구참자는 이러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둘이 아닌 기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닦아서 얻은바가 있다는 생각을 모조리 내려놓고 원점에서 출발한다는 각오만 있다면, 참회하는 절과 주력이 참선이 되고, 참선이 절과 주력이 되는 도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불ㆍ보살님들께서 세운 행원력(行願力), 즉 ‘고통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그 원력에 의지해 기도하는 방법은 복잡한 형식이나 고차원적인 생각이 필요 없다. 오로지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 정성 하나면 족하다. 따라서 일념으로 기도정진에 들어간 불자들은 절대로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자력(自力)으로해야 한다.
요행수를 바라는 기도는 마음에 잔뜩 때를 끼게 하고, 언젠가는 사도(邪道)로 빠져들게 한다. 기도의 대상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진실하게 정진한다면 업장은 소멸되고 복은 저절로 찾아들게 된다. 흩어진 정신 에
너지를 하나로 모아서 불ㆍ보살과 한 몸을 이루는 기도가 일상화 되면, 나에게 갖춰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개발되고, 내가 서 있는 이곳 또한 사바세계가 아닌 불국토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직한 기도의 결과인 소원성취는 수행의 과보로 얻어진 하나의 선물로서, 불ㆍ보살의 가피로 나타나게 된다. 틱낫한 스님이 “기도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우주가 인간에게 준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기도』,명진출판) 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를 잘 활용해 수행의 밑거름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불ㆍ보살의 행원력에 의지하는 기도가 깊어지면 자성불(自性佛) 즉, 본래의 자기를 향한 기도로 전환되기 마련이다. 참된 기도는 불ㆍ보살의 위신력과 서원을 찬탄하고, 제불ㆍ보살과 내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사무치게 깨닫는 수행의 과정이다. 따라서 기도는 결국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회향되는 것이어야 참된 신행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정해년(丁亥年) 한 해도 서산으로 저물고 있다. 끝없는 번뇌ㆍ망상으로 인해 미오(迷悟)를 반복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불자들은 당장 절과 주문, 염불 속으로 들어가 기도일념에 빠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