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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보면서 초발심을 생각한다

능해스님 / 성남 반야선원 주지


무덥고 지루했던 여름더위가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이맘때가 되면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그리고 몇 장 남지 않은 달력을 아쉬운 마음으로 자꾸 넘겨보게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바빠진다. 얼마 남지 않은 기축년.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여법하게 갈무리해야 될 것 같아 정초에 세웠던 계획들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해야 할 일들을 노트에 적어보기도 한다. 어렵고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은 기간만이라도 웃음이 묻어나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해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은 신문이나 방송을 접할라치면 은근히 겁부터 나는 경우가 많다. 기분 좋은 기사나 희망이 솟아나는 정보보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더 많이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를 위해 과격한 언행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끼리도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 아닌 기우까지 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는 4대강 사업문제, 행정수도 문제, 북한 핵문제 등 너무나 많은 시비와 갈등이 산재해있다. 하기야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에 어찌 갈등과 다툼이 없겠는가마는 현하 우리 사회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걱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럴 때일수록 이 세상을 먼저 살아오신 성현들의 지혜를 빌릴 때라는 생각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육화예경에 대해 법문을 설하셨다. 법문이 끝나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만약 의견충돌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율과 율이 아닌 것을 가릴 것이요, 범하고 범하지 아니한 것을 가릴 것이요, 가볍고 무거운 것을 가릴 것이요, 여지가 있고 없고를 가릴 것이요, 추악하고 추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릴 것이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릴 것이요, 막을 것과 막지 아니할 것을 가리며, 말할 것과 말하지 아니할 것을 가려서 화합에 힘써라.”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도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 무겁고 가벼움, 선과 후를 가리지 않고 자기주장만 한다면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갈등??이라는 용어다. 갈등??이라는 용어는 원래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사회에서 더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그 출전은 불교의 경전인 출요경(出曜經)이다.


기유중생 타애망자 필패정도 유어갈등 전수수고(其猶衆生 墮愛網者 必敗正道 猶於葛藤 纏樹樹枯)


중생들이 애욕의 그물에 얽매이게 되면 그 바른 도를 잃게 된다. 그것은 마치 칡넝쿨과 등나무가 나무에 얽히면 나무가 말라죽게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갈등이란 말의 출처다. 우리는 산업사회와 정보화시대를 이루기 전까지는 그래도 윤리와 도덕의 바탕 위에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하고 위하는 미덕을 발휘하면서 살아왔다. 가족들 간에도 애정과 효도로써 비교적 갈등 없이 안락하고 화평한 생활들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고 물질문명이 발달되고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인간사회는 갑자기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나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도로 팽배하여 남과 이웃은 전혀 고려치 않는 배타와 불신만이 만연해진 것이다. 거기에다 서구문화까지 갑자기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문화와 미풍양속까지를 빠른 속도로 해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흐르면서 우리는 이념과 사상적인 갈등, 가정과 사회적인 갈등, 정치와 지역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정과 가족들 간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이제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비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어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특히 그동안 유지해온 전통적인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화가 되면서 가족의 개념과 부모 자식 간의 효도개념이 희석 또는 망각된 현상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더구나 호주제의 폐지는 우리로 하여금 이에 대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가족과 가정의 개념, 효도의 개념도 많은 변화가 있는 듯하다.
불교는 효도를 중시하는 종교다. 그 예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라는 불교경전이다. 사실, 부처님께서는 효행을 무척 강조하셨다. 그것은 부모은중경 외에도 소?대승경전에 자주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특히 유교의 입장에서는 불교는 효도를 무시하는 종교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의 곁을 떠나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을 보고하는 견해일 것인데 이는 그 겉만을 보고 내면을 알지 못하는 소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불교는 절대 세속을 등한시하지 않는다. 또 부모에 대한 효행을 결코 무시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대중을 위해, 그리고 부모를 위해 출가를 하고 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출가는 부모를 비롯한 모든 중생을 제도키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정신과 사상을 오늘의 불교인과 사찰?불교단체는 널리 알리고 또 그를 실천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사회는 대립과 갈등을 걷어내고 화합할 수 있는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을 보고 아쉬운 마음에 이것저것 생각을 해본 것은, 결국 초발심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과 다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초발심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할 수 있다면 각자의 인생은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대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즉, 처음에 올바로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이 될 것이다.


<발문>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을 보고 아쉬운 마음에 이것저것 생각을 해본 것은, 결국 초발심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과 다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초발심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할 수 있다면 각자의 인생은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대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즉, 처음에 올바로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