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가을입니다. 검붉은 얼굴의 가을입니다.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으면 겨울이 온다 합니다.
엊그제 봄이 오는가 하였더니 쓸쓸한 가을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행동하고(行), 머무르며(住), 앉고(坐), 누우며(臥), 말하고(語), 말하지 않으며(默), 움직이고(動), 움직이지 않던(停) 간에 일상적으로 다, 우리네 삶으로 이어져 이것을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시작 되어 일주일, 한 달, 일 년으로 이어지는 시간들이…… 그런 나의 인생은 어떻게 회향되어지고 마는 것일까?
어제는 구룡사와 여래사에서 백여 명의 불자들이 함께 제천의 불교마을, 운조암에서 고구마 수확을 해 왔습니다. 트럭 3대에 산더미처럼 싣고도 넘쳐서, 시장 다닐 때 쓰는 승합차에도 가득 채워서 와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득 싣고 오다보니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구룡사 후원에서 사용하는 승합차가 고속도로에서 연달아 타이어 펑크를 내고 말았습니다.
내 일상생활에 신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기 관리를 잘하자’는 것인데, 타이어에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짐을 가득 싣고 가다가 일어난 일이니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오랫동안 타던 자동차는 잘 관리하여 미리미리 손을 보아 두어야 했습니다. 기계는 평소에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자동차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타이어 펑크와 같은 사고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자기관리입니다. 미리미리 살펴보아야 할 우리네 몫의 ‘조심’이라는 보살핌이기도 합니다.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부처님의 수승하신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모든 보살과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불가설불가설 불찰 극미진수 겁을 지내면서 계속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시지 못하느니라. 만약 이러한 공덕문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열 가지 넓고 큰 행원을 닦아야 하나니, 열 가지라 함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요,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요,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요,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요, 열째는 지은 바 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니라.』
《무량수경無量壽經》에도 『한 부처님이 출현하시면 만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 한 법당이 이룩되면 사바세계娑婆世界 안에 곧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만 부처님이 출현 하신들, 인연 없는 중생은 한 사람도 제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은 열 가지 행원 중 여섯 번째 행원으로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불찰 극미진마다 각각 불가설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광대한 부처님 세계가 있으니 이 낱낱 세계에 염념 중에 불가설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부처님이 계셔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보살들로 둘리워 계시거든, 내가 그 모든 부처님께 몸과 말과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을 지어 설법하여 주시기를 은근히 권청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내가 항상 일체 부처님께 바른 설법하여 주시기를 권청하는 것은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우리들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 계신 곳 없으신 부처님.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부처님을 늘, 닮아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불보살님을 향해 다가가는 지극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기도가 ‘오늘이 관음재일이라서, 또는 대입 백일기도일이어서’ … 이처럼 무슨무슨 기도 중이라서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백일기도, 입시기도, 취업기도 등을 올리는 것은, 한결같은 생활의 윤활유요, 비타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편으로 이어주는 선근인연의 끈이기도 하고 지혜등불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현보살은 부처님께서 언제든지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자들은 자꾸자꾸 부처님의 법을 전승해가야 합니다.
광대무변한 부처님의 세계가 헤아릴 수 없는 세상에 계시는 것을 염념 중에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은 모든 부처님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루셔서 불보살과 함께 하시는 곳에 모든 부처님께 몸과 말과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을 지어서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도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전에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마음을 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불자들이 법회 날 절에 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심이 있고 원력이 있어서입니다. 절에 와서 기도를 하고, 청법하는 그 모습이 바로 진지하게 살아 가고자하는 지극함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은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소유욕은 안 됩니다. 그러나 이루어 성취하면 회향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어 회향하기 위해서는 근본을 믿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행원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이나 보현행원普賢行願의 발원은 신심과 원력의 정진으로 회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섯 가지 인연으로 삼악도三惡道에 빠져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마음이 나쁜 연고입니다.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이들도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연고입니다.
‘지옥이 있는지 가봤느냐?’며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지으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복이 뭐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습니다.
복은 지혜智慧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장애가 없고 지혜롭습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박복한 사람이라, 세상과 부딪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번뇌煩惱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연유입니다.
화내는 사람치고 욕심 적은 사람 없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일컬어 번뇌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선근善根을 멀리 여읜 연유입니다.
본래 우리는 선근이라는 착한 마음을 엿으로 바꿔먹듯, 본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경험해 봄직한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한참 더 쓸 양은 냄비를, 엿장수 오면 몰래 가져다 엿으로 바꿔 먹었습니다. 구멍이 난 고무신도 꿰매서 슬리퍼처럼 쓸려고 찾으면 이미 엿장수가 가져가고 없습니다. 우리네 가난한 시절의 어린추억입니다.
다섯 번째는 나쁜 업業에 막힌 연유입니다.
나쁜 업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차단하려 합니다. 마치 나이 드신 분들에게 ‘떡 먹을 때도 조심해서 드시라.’고 하듯이 악업은 내 일상생활을 가로막고 차단하려 들기 때문에, 나쁜 업에 장애되지 않도록 피해갈 줄 알고 제어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나쁜 벗(동무)을 가까이하는 연유입니다.
법회에 가려고 하는데 놀러 가자는 유혹으로 절에 오지 못하고 따라나서는 사람은 부처님의 바른 법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려고 하는데 피시방 가자는 친구를 따라나선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성적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벗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연유입니다.
또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연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지 않는 연유입니다.
선업善業과 악업惡業 그 자체를 부정하고,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나쁘게 살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과보果報가 없다며 시도 때도 없이 떠드는 사람이 바로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보리심菩提心을 낸 사람을 해치는 연유입니다.
여기서 해친다는 것은, 감언이설로 망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심을 일으키게 하고, 어리석게 만들고, 탐욕의 욕구와 욕망과 욕심에 찌들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인과법으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남의 허물 말하기를 좋아하는 연유입니다. 허물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가족끼리도 그러는데 더 말해서 뭐합니까. 진정한 불자가 되려면 남 흉보기 좋아하는 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네 번째는 이게 옳은 일인지 옳지 않은 일인지, 법法인지 법이 아닌지를 거꾸로 말하는 연유입니다.
법 아닌 것을 법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삿되고 용렬한 무리들이니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는 세상의 허물을 구하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연유입니다.
법의 허물을 구하기 위해서 법을 듣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종교나 사찰에 가서 무슨 이야기하면 ‘꼬투리 잡을 것 없을까?’ 궁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 전에 항상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길을 떠났을 때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면 편리하게 길을 찾을 수 있듯이 부처님께 항상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