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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속에 투영된 자연에 순응하는 수행 모습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가을이 지나가고 있나 봅니다. 사계절 가운데 가을을 좋아하는 이들이 유난히 많은 것은, 여름 그 더위 속에 헐떡이며 기다려온 보람도 없이 이렇듯 훌쩍 가버리는 게 아쉬워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언제 떠날지 모를 좋은 사람 곁에서 만류의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곁눈으로만 바라보는 이의 마음처럼, ‘방금 스쳐간 그 바람이 잰 걸음으로 구비를 돌며 떠난 가을의 옷자락이었나’ 하게 되는, 그런 나날들입니다. 밤바람이 꽤나 차가워졌습니다.
가을의 감성에 유달리 예민한 존재로 명태를 든 한 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명태는 여름 내내 인파와 태풍에 거칠게 출렁이던 동해 바다의 결이 가지런히 눕고 물빛이 깊어지기도 전에, 설악이 단풍으로 물들 기미도 보이기 전에, 먼 바다를 건너와 동해 해안선을 따라 노닌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연근해에서 명태가 사실상 사라진 게 10년 가량 됩니다. 해수 온도가 높아져서 이 대표적 한류성 어종이 입맛을 다실만한 매력을 잃어버린 데다 오랜 남획으로 어족자원이 고갈된 탓도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명태 황금어장이던 강원도 고성군은 이달 말경 명태 축제를 엽니다. 주최 측은 명태가 성장과 생식에 필요한 필수아미노산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고, 질 좋은 비타민A와 나이아신, 레티놀 등도 많아 인체의 피부와 점막 보호, 주름 방지에 좋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축제의 공간은 거진항입니다. 미끈한 명태의 활력으로 북적이던 항구는 먼 바다에서 잡아온 명태들로 그득할 것입니다. 예전보다 먼 물길을 오가야 하는 어부들도 더 고단해졌고 어장의 명태 역시 시르죽어 있겠지만, 축제는 늘 흥성하다고 합니다. 그들의 축제는 사라져버린 바다의 가을을 그리워하며 옛 시절을 환기하는, 그럼으로써 가을의 회귀, 명태의 회귀를 기원하는 애틋하고 간절한 기도의 장이기도 합니다. 
가을 바다에 명태가 있다면 가을 산에서는 송이버섯이 있습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적송 숲을 따라 주로 나는 송이는 식생이 까다로워서 기온과 습도와 생장 환경이 잘 조화해야 자란다고 합니다. 경험이 많은 송이 농사꾼은 추석 지나고 선선한 날들이 며칠 이어지면 몸의 본능처럼 산의 능선을 탑니다. 산삼만은 못하지만 워낙 고가여서 각자가 점찍어 둔 송이 식생지를 가족에게조차 알려주지 않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또 해마다 산출량이 들쭉날쭉해서 서민들로서는 송이 맛도 못 본 채 해를 넘길 때도 흔합니다만, 그 치밀하고 두툼한 살집과 특유의 향기는 가을의 입맛을 다시게 합니다. 다행히 올해는 강우량이 알맞아 풍년이 기대된다는 소식입니다. 


보리사 선재 스님이 수년 전 한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재 스님의 말씀인지, 인터뷰어의 글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거기에는 ‘음식이 곧 약’이라는 말과 함께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곳의 100리 안의 것을 먹되 몸이 안 좋을 때는 70리 안의 것을, 많이 아플 땐 30리 안의 것을 먹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주생활을 하던 농경시절에야 싫어도 제가 나고 자란 곳의 산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겠습니다만, 공부나 취직을 위해 타향살이, 타국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으로서는 우리의 먹는 일상이 옛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안쓰러워졌는지, 다시 말해 위험해졌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저 말이 반드시 옳다는 근거도 없고, 우리의 현실에서는 과도한 요구여서 은근히 반발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공간과 인연을 맺고 그 공간의 시간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맥락 속에는 각자의 몸을 만든 특정 공간의 땅과 물과 바람에 밴 향기의 작용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계절이라는 시간의 순환과 함께 몸의 신진대사가 이루어지고 그 거대한 자연의 원리 안에 인간 존재의 원리도 엮여 있는 것이라면, 자연이 제 철에 나눠주는 것들을 순하게 따라 먹는 것이 옳다는 고래의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그럴싸한 전통 음식을 크게 나누는 기준 가운데 궁중음식과 양반음식, 교방음식, 사찰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궁중음식의 주 메뉴는 주로 전국 팔도의 관리들이 진상한 귀한 특산물들을 식재료로 썼을 것이고, 당대의 가장 빼어난 숙수들이 갖은 정성을 다해 장만했을 것입니다. 군주의 위의威儀에 기대, 지금도 가장 훌륭한 음식을 ‘수랏상’에 비유하는 관습은 물론 그럴싸합니다. 하지만 대궐에서 나고 자란 임금이 전국의 갖은 음식을 다 먹는다는 것은, 식재료의 산지와 삶의 근거지의 관련성을 염두에 둔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함경도나 강원도, 또 더 먼 남도의 바닷가에서 난 식재료가 천리 길 한양까지 이송되는 동안, 말리거나 찌거나 훈제 염장해서 보존성을 높이긴 했겠지만 결코 제철음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궁중음식은 음식 자체로서는 한국 최고의 음식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음식에 대한 관념과 전통 그리고 먹는 이의 몸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바람직한 음식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가음식이나 교방음식 역시 기름지고 대체로 화려합니다. 특히 술자리 접대음식인 교방음식은 산해진미의 총화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그 다채롭기가 궁중음식을 능가한다는 평도 있습니다. 조정의 큰 행사 때마다 전국의 빼어난 기생들이 궁중에 불려갔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맛본 음식들을 응용하고 타 고을의 음식까지 참조하면서 계승 발전시켰으니 가장 화려하고 또 풍요롭다고 해도 그릇된 평가는 아닐 것입니다.
반면에 사찰음식은 소박함과 정갈함을 앞세웁니다. 육식을 금하고, 절이 깃들인 고장의 산과 들에서 나고 자란 제철 야채를 주재료로 삼습니다. 아시겠지만 채소라고 다 먹는 것도 아닙니다. 오신채(五辛菜 : 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라 하여 향이 짙고 자극적인 것들은 멀리 합니다. 《능엄경》은 “오신채는 날로 먹으면 분노하기 쉽고, 익혀 먹으면 욕망이 일어나니 수행자는 피해야 하는 음식”이라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먹는 것에 지나친 품을 들이는 것조차 탐심이라 하여 경계하는 절집이고 보니 음식을 만드는 공정 자체도 단순해서, 누구든 금세 따라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가리는 게 많고 공정이 간단해서 가볍고 거칠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꽃들이 화려한 봄철의 사찰 음식은 야채샐러드건 화전이건 인위의 조작 없이 아름답기가 자연 그대로입니다. 대충 거칠게 만들어 정성이 부족한 듯 보이지만, 이미 재료 안에 깃든 자연의 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무위의 정성, 마음의 정성이 그리 드러나는 것입니다. 뿌리를 잘라 미끈하게 다듬는 것이 정성이 아니라, 그 뿌리조차 잘 손질해 음식 속에 고루 갖추는 것이 더 큰 정성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음식 속에 자연에 순응하는 수행의 모습이 투영된 것입니다.
불국사의 말사인 경북 울진 불영사의 일운스님이 최근 사찰음식을 소개한 책 《김치나무에 핀 행복》을 냈습니다. 전문적인 사찰요리가 아니라 스님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먹는 일상의 음식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일운스님은 가장 좋은 음식으로 “화려하게 많은 재료가 들어간 음식보다 문 열고 밭에 있는 음식을 뽑아서 먹는 게 최고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먹는 게 가장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순수한 순응의 음식이 각박하고 다급한 인간의 심성을 다독이고 몸의 어지러움을 정돈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달궈진 것도 꽤 오래된 일이고, 사찰음식에 대한 대중적 인기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사찰음식 전문점은 어디건 고급 음식점으로 꼽히고, 만만찮은 가격에도 붐빌 때가 많습니다. 불교가 음식으로 이룬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세상이 뒤늦게 알아챈 것입니다.
물론 현대인이 아는 바대로 식사를 챙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리적 정서적 여유가 없는 것도 핑계만은 아닙니다. 퇴근해서는 간편 조리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이 보약’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서둘러 잠자리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동네 마트를 가더라도 야채코너에 먼저 들르고 좀 더 오래 머물러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다른 계절에 비해 가을의 먹거리가 유달리 다채롭거나 풍성한 것은 아니지만 문득 음식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 것은, 일운스님의 책을 본 영향도 있지만, 비닐만 벗겨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는 반찬과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가공된 고기, 구색을 맞추듯 한 귀퉁이에 놓인 김치로 차려진 저의 저녁 식탁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한 끼의 공양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또 거기서 생명의 자비를 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 쉬워 보이는 일을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는 일상을 되돌아본 것입니다.
가을은 자성의 계절이기도 한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