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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가치

승한 스님
북한산 중흥사


삶의 궁극의 가치는 뭘까? 단연, 행복이다. 행복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값어치가 없다. 의미와 목표도 없다. 꿈과 희망과 동력도 없다. 끔찍하다. 깨달음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21세기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고 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삶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삶의 모든 행위가 행복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또 톨스토이·러셀과 함께 세계 3대 행복론의 저자인 알랭도 “인간은 행복하게 될 의무가 있다. 염세주의는 기분에서 오며, 낙천주의는 의지에서 온다. 딸기에는 딸기의 맛이 있듯 인생에는 행복의 맛이 있다.”고 설파했다.
삶의 궁극의 가치는 이처럼 자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잊고 산다. 아니, 느끼지 못하고(혹은 각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감각이 주는 쾌락과 고통에 젖어 산다. 그리곤 쾌락의 감각이 올 땐 그것을 행복이라 착각하고 그것에 푹 빠져들고, 고통의 감으로 찾아들 땐 아프고 괴로워하며 불행해한다.
행복의 본질을 알면 궁극의 가치를 찾아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행복의 본질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here & now)’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석이 바로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반 트루게네프(도스토예프스키·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이끌었던 3대 거장)만큼 행복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이도 없다. 트루게네프는 행복을 논하면서 “행복에는 내일이라는 것이 없다. 어제라는 것도 없다. 행복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거니와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행복에는 현재만 있다. 그것도 오늘이 아니라 다만 순간적인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25시』의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는 이 원석을 ‘불행 속에도 행복은 (항상) 움츠리고 있다.’고 묘사했다.
행복의 원리는 그런 행복의 원석을 더 빨리 캐게 해준다.
가장 중요한 행복의 원리는 ‘마음관리(修心)’다. 마음을 잘 닦아 선한 성격을 더 키우고,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탐진치)’을 없앨수록 행복의 사다리는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요구되는 것이 ‘여덟 가지 바른 삶의 길(八正道 :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다. 그 가운데서도 ‘바르게 깨닫기(正見)’와 ‘바르게 생각하기(正思惟)’가 행복으로 가는 첫 단추다.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눈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과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로 보고 바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평화롭고, 행복해진다.
불교 명상법은 이때 아주 효과적인 수행방법이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들여다보고 관찰해 내 마음의 방향을 긍정적이고 선한 쪽으로 바꾸고, 이동시키는 것이다.
텅 빈 마음 상태로 그냥 가만히 깨어 있기도 퍽 효율적인 불교 수행법이다. 이 명상법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최상의 깨달음(正覺)’을 얻으실 때 사용하셨던 명상법(아나빠나사띠)이기도 하다. 텅 빈 마음으로 코끝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자신의 호흡을 느끼며(혹은 관찰하며) 아무것에도 걸림 없이 그냥 가만히 깨어있기만 하면 된다.(내 스승이신 용타스님은 이 명상법을 ‘돈망頓忘’이라 명명하고, 이 명상법을 통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는 ‘백산百山’ 운동을 펼치고 계신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 1,250인의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만 듣고도 한 순간에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명상법 때문이었다.
행복의 문으로 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 ‘화합’하고 ‘선한 일, 착한 일,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하는 것(作善)’이다. ‘매사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 이 원리의 핵이다. 지금 현재 나와 내 것과 내 앞에 있는 것에 만족하며 세상 만물에 감사하고 살 때 욕망이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지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면, 화가 사라지고, 화가 사라지면 고통과 싸움도 사라져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너와 내가 화합을 이룸으로써 온 우주와 세상은 물론 너와 나도 저절로 행복해진다. 달라이 라마는 이를 일러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 했고, 『법구경』에선 이를 ‘지족최부知足最富’라 일렀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부자’라는 뜻이다.
행복으로 가는 또 하나 중요한 원리는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순간순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을 충분히 누리며, 순간순간에 충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은 매순간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는 것은 실상 우리의 환경조건이나 주변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순간순간의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만족하고 얼마만큼 누리느냐에 달려있다.
순간순간을 1초라해도 좋다. 1초 전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없고, 1초 후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쉴 새 없이 내 앞에 왔다가 소멸해가는 1초1초를 놓치지 않고 충실히 깨어 만족하고 살 때, 게오르규의 말처럼 아무리 불행한 순간에도 행복은 내 안에서 항상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내 삶은 결국 그 1초1초들의 집적에 불과하잖은가.
이 세상이 ‘나다 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할 게 없다(我空法空)’는 것을 아는 것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중중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법의 이치만 깨달으면, 그리고 그 이치대로만 행하고 살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도 행복과 감사는 숨 쉬고 있다.
행복이 그냥 주어지지 않는 것은 이 같은 행복의 원리와 속성 때문이다. 알랭의 『행복론』은 그 해법을 ‘전심전력’에서 구하고 있다. “우리가 행복을 바란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행복이 들어오든 말든 문만 열어놓고 방관자의 입장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슬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고, 절과 교회와 성당을 찾고, 갖가지 영성수련회에 참가해 ‘마음 닦는 연습(修心)’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결국은 알랭의 말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행복을 구하고, 잡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전심전력을 다해 행복을 잡는다 해도 그것이 일개인의 행복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진짜 행복이 아니다. 보다 궁극의 행복은, 궁극의 가치는 ‘우리 모두의 행복’에 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사회, 우리 민족, 더 나아가 세계 인류와 무한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유정무정물에게까지 나의 행복의 동심원이 폭넓게 뻗쳐 갈 때 비로소 나의 행복은 진짜 행복이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추구해나가야 할 삶의 궁극적 가치가 된다.
생각해보라. 나 혼자만 행복하겠다고 날마다 술만 마시고 살면 나머지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는가. 우리 가족만 행복하게 살겠다고 도둑질하고 강도질하면 그것을 당하는 우리 이웃과 사회는 얼마나 불행해지겠는가.
그러므로 행복의 동심원은 크고 넓을수록 좋다. 석가모니와 예수와 마호메트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행복의 동심원이 무한 우주로 무한대로 뻗쳐갔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기집착에서 벗어나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로 온 세상을 감싸 안으며 ‘우리 모두의 행복’을 비는 대원大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내 행복의 동심원은 얼마나 클까? 지름이 얼마나 될까? 가만히 내 행복의 동심원을 그려본다.
행복과 행복의 동심원은 결코 우리를 피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행복과 행복의 동심원을 애써 그리지 않고, 잡지 않고, 애써 피해갈 뿐이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는 것은 앞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그 희망이 바로 행복이고, 궁극의 가치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오늘 하루, 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오늘 하루,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았는가? 살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 진정으로 ‘힘차게’ 대원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세상이, 몰라줘도, 진정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