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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에서의 선불교 비판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주자朱子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에 중국 송나라에 살았던 유학자 주희(朱喜 1130~1200)의 존칭이다. ‘주 선생님’이라는 뜻이고, 본명은 주희이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모시』, 『상서』, 『주역』, 『예기』, 『주례』,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춘추좌전』, 『논어』, 『효경』, 『이아』, 『맹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13경이라 불리는 고전을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들의 저서와 그리고 역대의 역사서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둘러싸고 그네들은 모였던 것이다.
주자와 그의 제자로 이루어진 이 학문 공동체는 당시의 유교 고전을 바탕으로 그가 살았던 현실 문제를 고민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주자가 제자들과 토론한 내용을 거기에 참석한 제자들이 기록하여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은 『주자어류』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주자어류』는 토론한 주제별로 정리했는데, 그 실례를 크게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태극에 관한 논의’, ‘귀신에 관한 논의’, ‘인성에 관한 논의’, ‘어린이 교육에 관한 논의’, ‘독서에 관한 논의’, ‘행동거지에 관한 논의’, ‘유교 경전에 관한 논의’, ‘과거 유학자들에 관한 논의’, ‘제자들에게 훈계한 이야기’, ‘노자 장자 열자에 관한 논의’, ‘불교에 관한 논의’, ‘역사에 관한 논의’ 등이다. 이렇게 해서 총 1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1권의 분량이다. 그것이 『주자어류』 『석씨釋氏』편이다.
가장 중심으로 이루었던 이야깃거리는 유교 경전에 관한 것으로, 약 80권 분량에 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 관한 부분은 1%도 안 된다. 게다가 불교 중에서도 선불교에 한정된 논의이다. 주자는 선불교의 비판을 통해서 ‘동아시아’ 사상사 위에,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찍으려 했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즉, 유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다른 어떤 사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성을 천명한 것이었다.
유교만이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주자의 확신이다. 선불교는 ‘초월’만을 일삼아 ‘현실’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 주자의 확고부동한 체험이자 이론이다. 『주자어류』에서 양으로 보면 불과 1%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주자의 철학이 선불교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혹은 반동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선불교의 비판을 통해 불교적인 세계관을 청산하고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유학사상을 재창조하는 일을 시도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위에서 필자는 ‘동아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필자가 임의로 쓴 용어이다. 주자가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주자에게는 ‘천하天下’라는 말이 걸맞을 것이다. 그는 ‘천하天下’를 걱정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인민들의 삶을 가꾸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19세기 말 서양의 동양 침략이 계기가 되어 ‘천하天下’가 ‘동아시아’라는 이름으로 ‘The World’ 즉 ‘세계’에 편입된 것이다.


2.
주자는 모든 유학자가 그렇듯이 ‘수신(修身 = 자신의 수양)’ ‘제가(齊家 = 가족 공동체의 관리)’, ‘치국(治國 = 국가 공동체의 관리)’, ‘평천하(平天下 = 세계 공동체의 관리)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보기에 ‘초월’을 일삼는 불교, 그 중에서 선불교를 청산하고, ‘초월’과 ‘현실’을 조화·통일하는 새로운 유학 사상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서經書의 훈고를 일삼는 과거의 유학에 주자는 만족할 수 없었다.
새로운 유학이 아니고서는 새 중국의 건설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주자의 이런 정신과 노력은 원나라와 명나라와 그리고 청나라에 들어서 결실을 맺어 이 지역 인민들의 생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회제도를 만들고, 경제 및 법질서를 확립시키고, 중화주의에 입각한 대 외국 관계의 초석을 놓았다. 이러한 주자의 지적인 활동을 후세의 연구자들은 신유학新儒學이라고, 유학儒學 앞에 ‘새 신新 자’를 붙여주었다. 중앙 집권적이면서도 지방의 분권을 수용하는 거대한 제국이 운영되는 기본 틀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자어류』의 1%에도 못 미치는 분량을 할애하여 주자는 선불교를 비판했지만, 주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주자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당시의 문제를 무엇이라고 주자는 생각했는지, 나아가 주자 당시의 불교계가 어떠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주자어류』의 「석씨釋氏」편만한 자료가 없다.


3.
주자가 선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동아시아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위에서 보았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일어났던 불교 비판도 내용을 보면 주자의 것을 들여온 부분이 많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불교비판도 따지고 보면 ‘아류’에 불과하다.
주자가 선불교를 비판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임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지금의 연구자가 요약·정리·분석하는가가 남았다.
중국의 철학사상을 이른바 학문적, 객관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기부터이다.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유교적인 사회의 몰락과정에서, ‘선교’ - ‘호교’ - ‘수양’ 등의 입장에서 벗어나, 철학사상을 객관적으로, 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의 선두 주자 중의 하나가 제국주의 하의 일본인이었다. 이들이 유학을 연구하고 기술하는 방식으로 내놓은 것 중의 하나가 ‘본체론’, ‘인성론’, ‘수양론’이라는 ‘관점’이었다. 이 ‘관점’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세계 식민지 경영을 꿈꾸던 당시의 유행이었다. 우리나라에는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소개·확산되었다. 지금도 그 관점이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유학을 ‘본체론’, ‘인성론’, ‘수양론’의 세 측면에서 재구성하면 그 이전의 어떤 방법보다 유학에 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 측면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 관념론을 수용한 명치유신 시기의 학문이 그 배경이다. 여기에는 동양(특히 중국)은 후진되었고 낙후되었다는 문명사적 관점이 깔려 있다. 유럽 철학의 전통에서 논의되어 온 논리학·형이상학·인식론·윤리학의 관점으로 중국의 사상을 분석한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피아노라는 악기로 궁중 제례 음악을 연주하는 꼴이다. 피아노가 참으로 훌륭한 악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궁중 제례 음악의 음색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본토에서 스스로 비판하고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유학계는 여전히 전가의 보도처럼 ‘본체론’, ‘인성론’, ‘수양론’의 관점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관점으로는 다양한 유학의 역동적인 기능을 밝히기 쉽지 않을 것이다.


4.
필자는 대안으로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주자의 사상을 정리할 것을 여러 방면에서 주장한 바 있다. 일상의 사회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유학은 초월을 구현한다. 그들은 윤리와 초월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많은 종교와 사상이 인간의 보편성을 각자의 철학 체계에 논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구체적인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특수한 요소나 차별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본래성만 강조하다보면 현실성 내지는 특수성에 소홀하기 쉽다. 주자의 유학에서는 본래성과 특수성에 대한 균형 있는 조화를 늘 강조한다. 이런 주자의 입장에 서서 본다면 ‘당시 선불교의 종교형태’는 극복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 선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주자가 선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자는 당시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주자의 불교이해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선불교를 비판하는 주자를 지금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이상과 같은 필자의 방법을 그대로 오늘의 한국 땅에서 펼쳐지는 선불교에도 대응해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선불교는 어떤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의 치유’를 넘어서는, 또는 그것을 포함하여 사회윤리의 측면에 선불교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주자가 그렇게도 비난하고 비판했듯이, 선불교는 현대 한국 땅에서도 그저 ‘초월’만 이야기 하고,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아닌가?


E-mail : anand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