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대사 지음
조은자 옮김
<지난호에 이어서>
후에 그는 애정의 늪에 빠져 감정의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젊은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결국 세상을 비관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그때 타이베이에 있었더라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이미 저는 가오슝에 내려와 있었기에 유감스럽게도 이처럼 유망한 불제자 하나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구속하지 않고 왕래했습니다. 그는 늘 스승으로 삼을만한 벗이었고, 항상 평등하고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업무적인 인연에서는 서로를 배려했습니다. 때로 그가 갚은 밤까지 쉬지 않고 있으면 저도 그에게 다과를 내어주고 식사를 가져다주며 그를 가까운 친구처럼 대하였지, 제자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교’ 외에도 당시 양석명楊錫銘·주광유周廣猷·구덕감.德鑑 대령·향언享言 대령 등이 모두 이란 합창단과 홍법대의 구성원이자 진정한 호법이었으며, 인간불교의 기초를 뿌리내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록 군대 내에서 그들의 지위는 높았지만, 저는 이 많은 장교들을 대함에 있어 그들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았고, 제 자신이 우월하다 생각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서로 존중하였고, 그들도 저와 즐겁게 왕래하며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평등하게 대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병사를 거느리려면 그들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사이이든 스승과 제자 사이이든 부자 사이이든,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제가 남을 대하는 관리방식이자, 관여하지 않는 관리라는 관리학입니다.
장우량(張友良, 자련慈蓮 보살)
이란 가영대歌詠隊의 주요인물인 장우량 양은 란양여중蘭陽女中을 졸업했고, 5, 60년대 전에는 매우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명성도 대단해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주선(周璇: 대중음악 가수이자 배우이며, 민국 시기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힘)’이라 불렀습니다.
재능 있는 그녀는 여러 곳을 다니며 군 위문공연, 상장수여, 프로그램 진행 등을 하였으며, 이란 전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노래를 하기 위해 우리 합창단에 참가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말을 건네도 그녀는 본체만체했습니다. 항상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고 교만한 성격의 그녀가 출가자를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당시 제가 만든 이란 합창단은 가끔 집회를 가지면 여러 사람과 잠깐 법문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녀도 듣고 난 뒤 차츰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생겼고, 염불회에도 종종 참가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스님, 염불만 하면 되었지, 왜 예불까지 해야 해요? 머리가 땅에 닿도록 부처님께 절 올리는 것은 정말 보기 싫어요.”
“보살님 말씀도 맞습니다. 그럼 바닥에 머리를 대지 말고, 절도 하지 마세요. 앞으로 사람들이 절을 하면 보살님은 그냥 서 있어도 됩니다. 그것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절을 하는데 그녀 혼자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으니 절을 안 하기도 곤란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또 제게 말했습니다.
“예불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부처님 주위는 왜 돌아야 하죠?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요.”
“그 말씀도 맞습니다. 그럼 저들이 부처님 주위를 다 돌고 올 때까지 한쪽 옆에 서 계십시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고, 저도 그녀의 뜻을 따라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부처님 주위를 돌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 한쪽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를 따라 함께 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저에게 천진난만하게 말했습니다.
“예불도 정말 좋고, 부처님 주위를 도는 것도 너무 좋아요.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이 교만했던 아가씨가 결국에는 차츰 도심道心이 생겨날 것이고 일도 잘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기회와 인연이 무르익었다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장 보살님! 저는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합니다. 제가 없는 동안 이곳의 청년회와 학생회, 그리고 아동반을 대신 관심을 갖고 돌봐주고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제가 왜 관심을 갖고 도와줘야 하는데요?”
그녀가 차츰 성장하고 있고 불자로서의 기본예절이 어느 정도 성숙했다고 생각해서 좋은 뜻으로 부탁을 한 것인데, 그녀의 이 대답은 제게 실망과 낙담을 주긴 했지만, 제가 그녀를 싫어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녀가 천천히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그녀는 귀의하여 법명을 자련이라 하였으며, 이란 염불회에서는 자장·자혜와 함께 천하삼분天下三分이라 불리며 각자의 특기를 발휘했습니다. 자장은 법회업무에 능통했고, 자혜는 설법 통역에 능통했으며, 자련은 성악에 능통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아동반의 담임을 맡아 아동반을 이끌며 봉사했고, 1~20년 동안 학생회 회장을 맡으면서도 거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리학 방면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것은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차근차근 타이르고 일깨우며 순응하고 포용해야 하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키워내어 인연이 구족되면 자연 해결됩니다.
사자범謝慈範
사자범 양은 이란의 귀족 출신으로 항저우(杭州)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소프라노 성악가였습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한 번 들으면 정말 다시 듣고 싶은 노래였습니다. 60여 년 전에 아직 TV에서 공연하는 그녀의 노랫소리와 모습이 분명 모두의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이란 뇌음사 맞은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사찰에 예불하러 오셨고, 오빠네 부부도 가끔 들리는 편이었지만 그녀는 절에 온 적이 없었습니다. 훗날 그녀가 시집갈 때 그녀의 부모님은 시중드는 아이를 딸려 보냈을 뿐만 아니라 『대장경』을 혼수처럼 함께 보냈습니다.
그녀는 비록 불교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보통 사회의 여성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고, 심지어 젊은 스님을 보면 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관음득도觀音得道’라는 영화를 보러 가는데 저도 꼭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저는 현재 영화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 수도 있는 기회이니 가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20여 명의 신도에 둘러싸여 가고 있는 저를 보고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극장에서 나와 사찰로 돌아가려 할 때, 그녀는 “제게 불교에 관한 의문점이 좀 있는데, 내일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음날, 그녀는 저를 찾아와 불교에 관한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후에 그녀도 발심하여 귀의했고, 법명은 자범慈範이라 했습니다.
민국 45년(1956), 중화불교문화관은 『대장경』 발행을 위해 사회의 후원을 얻고자 전국을 돌며 홍보할 팀을 꾸렸습니다. 단장은 남정 장로南亭長老가 맡고, 저는 단체를 이끌고, 이란 합창단의 청년들이 단원으로 참여하여 20여 명이 위풍당당하게 나아갔습니다.
사자범의 노랫소리는 맑고 깨끗하여, 가끔 불교를 전파하면서 그녀가 소프라노 한 곡을 부르면 매우 놀랍고도 신선하여 관중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도 단체에 합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귀족 가문 출신인 그녀가 단체 안에서 다수의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무척 걱정되었습니다. 단체 안에는 서로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다함께 어울리고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후에 그녀도 다른 대원들과 함께 고생하고 인내하며 홍법에 쓰일 도구를 운반하는 것을 보고 저도 안심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