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사 ‘청암다실’에서
         
                 
이서연
시인
잠시, 씨앗의 하루를 생각했다. 씨앗은 어마어마한 우주를 품고 있다. 그 안에는 억겁의 인연줄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햇살의 기운과 시간이 빚은 숨이 농축되어 있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잎을 피우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우고, 꽃이 열매를 맺는 일이 생명을 가진 것들이 반복하고 순환하는 가운데 우주는 그 신비함은 풀어낸다. 결실의 계절, 다시 씨앗들은 우주를 품는 시간으로 들어간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우주 삼라만상이 돌아가는 이치 속에 그 시간이 풀어낸 것들이 나타난다. 그것이 ‘존재’라는 실상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매달려온 ‘나’의 모습도 ‘나’를 떼어낸 자리에서 바라본다.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가을향이 농숙해지는 날, 그 향기에 우연히 찾아간 청암사는 긴 겨울 준비에 분주했다. 그야말로 사계절 중 가장 긴 시간으로 들어갈 준비 아니겠는가. 저 많은 배추가 부지런한 손들 사이에서 목욕재계하고 남을 이롭게 할 수행을 준비 중인 듯 보인다. 싱싱한 배추가 깊은 산사에서 바다의 기운을 품고 온 소금에 몸을 담그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 익을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그걸 바라보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서 무엇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이처럼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숙성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존재가 되려는 기다림의 침묵엔 고행과도 같은 시간의 늪을 건너야 한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담그는 김치엔 솔향을 보태고 고요가 밤을 태우는 시간 달빛을 듬뿍 뿌리면 더할 나위 없는 양념이 된다. 저 김장은 이미 맛 본 듯 벌써 혀끝이 저릿하다.
청암사는 부처님의 영험이 깃들어 있는 불령산 품에서 100여 명의 학승들이 수행 정진하는 곳으로 잘 알려진 비구니 사찰이다. 수많은 수행자들의 화두를 삼키고 있을 듯한 불령산을 수도산이라도 불리우는 것은 이미 숙업에 굳어진 별칭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청암사는 조선 숙종 때 폐서인이 되었던 인현왕후와도 인연이 있는 까닭에 일주문에서 천왕문 편액이 보일 때까지 숲을 걷는 동안 진한 적송의 향기가 세월을 반추하는 느낌이 들었다.
농숙한 가을을 담고 있는 건 단풍만이 아니다. 절 입구 다리 아래 개울을 호계라고 한다. 여기에 이끼 낀 바위벽이 가을의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중국 여산에 호계라는 시내가 있다고 한다. 중국 정토교를 연 혜원이라는 고승이 동림정사을 짓고 용맹정진하고 있을 때 그 어떤 손님이 오더라도 호계라는 개울까지만 손님을 배웅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유학자였던 시인 도연명과 도사인 육수정이 찾아와 얘기를 나눈 후 그들을 보내다가 무심코 호계를 지나쳤다. 문득 이 사실을 깨닫고 세 사람이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삼소천三笑泉’는 이런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샘이다. 여산교廬山橋를 건너는 사이 삼소의 일화를 담고 흐르는 호계를 떠올리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산사의 다리는 중생계와 법계를 이어주는 듯 하다. 다리하나 건너며 참 많은 생각을 떨어내게 된다.
자연은 꾸미지 않지만 계절은 자연을 색다르게 꾸미는 재미로 변하는 듯하다. 인현왕후도 이 자리를 지나며 들었을 것이라 여기고 들으면 우비천의 물소리마저 법문이 된다. 세월의 씨앗들처럼 자라는 바위의 이끼들은 인현왕후의 소리 없는 숨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흘리지도 못하는 눈물을 보았을 것이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무엇을 바라 삶을 버텨야 할지 모를 때 자연은 잠시라도 숨을 틔워주는 터였고, 부처님 도량은 숨김없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쉼터였을 것이다.
하늘빛을 떼어다가 빚은 듯한 푸른 기와의 대웅전 앞에는 시간의 무게를 찬란하게 감내하고 있는 다층석탑이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한다. 이번에도 석탑 앞에서 이 산사로 인연다리를 놓아 준 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나와 인연 있는 분들을 위한 기원이 곧 나를 위한 기도다. 나를 위한 기도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나와 인연있는 분들을 위한 기도로 향불을 피우기라도 해야 맘이 편하다. 이런 것엔 이유가 있어야 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다층석탑 뒤편 정법루와 육화료는 승가대학 중심채이다. 거룩한 서원을 가슴에 품고 육화료에서 부처님 법을 배우고 도량 곳곳에서 다짐하고 염원하는 바를 몸으로 실천하며 수행하는 분들의 생활이 눈으로 그려졌다. 인현왕후가 머물 수 있게 지은 집은 극락전이 되어 있고, 환궁의 날을 기다리며 기도했다는 보광전은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하늘빛을 머금고 맑은 물을 담아 둔 삼소천 앞이 백화당이다. 그 앞에 인현왕후 경행길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그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뻔한 궁금함에 뻔할 수 밖에 없는 미소가 지어진다.
 
산은 계절로 얘기한다
계절은 산에 다른 얼굴을 만들어 주고
세월에 숨어 인연의 길을 만든다
 
숨은 ‘나’는 어디서 웃는가
웃는 ‘나’는 무엇으로 존재되는가
‘나’는 웃음 안에 있는가 웃음 밖에 있는가
-단풍으로 타는 육화루에서 -
 
도량을 도는 동안 마음은 그대로 단풍이 되어 버리고, 어디론가 떠날 차비가 끝난 단풍은 안과 밖이 없는 이치를 몸으로 전하고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산사에 오면 바람도 보인다. 이미 자연 속에선 보이지 않는 마음이 따로 없다.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은 제법 싸늘하다. 숲 속에 작은 찻집이 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그 찻집을 찾게 된다. ‘청암다실’이라는 글씨보다 ‘멈춤’이라는 글씨가 더 커서 ‘멈춤카페’인가 싶었다. ‘나를 만나는 멈춤’ 그 자체만으로도 잠시, 마음 하나 내려놓게 된다. 묘하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자유는 스스로에게 있는 것, 누가 다그치지 않아도 바빴던 건 내 탓 아니겠는가. ‘멈춤’을 보는 순간, 숨이 편안해 진다.
찻집 크기보다 큰 난로가 창가의 햇살까지 모아 태우니 마음부터 따뜻해 진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햇살 한 줌이 주는 평온을 전해 준다. 그 평온 몇 조각을 찍은 후 따뜻한 차는 숲에서 마시고 싶어 나왔다. 향기부터 넘어가는 커피를 눈으로만 마시는 순간, 찻잔에 새겨진 글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를 이끌어가는 진실한 나를 믿어라”
그렇다. 멈추니 나를 보게 되고, 나를 이끌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사랑하는 나를 만납니다
이 순간, 멈추어 만나는 나에게 인사합니다
견뎌온 눈물의 무게만큼 단풍은 진하게 물들고
단풍에 잠긴 향기만큼 삶은 깊어 가는 것
그 수고에 감사한다고
눈치없이 살아가는 지혜에 위로를 보내며
나에게 차 한 잔 건네봅니다
-‘청암다실’에서-
 
싸늘한 날씨도 포근한 건 햇살 덕만이 아니다. 멈추고 나를 만나니 따스해 진다. 그래, 이렇게 자주 나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