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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보는 우리네 인생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일 년 24절기 중, 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습니다. 하지만 선선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제는 완연히 가을이구나.’ 하는 느낌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들, 그중에서도 몇 분의 큰스님 깊은 인연은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 인연 속에서 불자님들과의 만남들은 참으로 귀한 인연입니다.
『열반경』에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떠남을 보고 그것을 죽음으로 알지 말라. 열반은 죽음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2,570년 전 열반에 드실 때 남기신 가르침입니다.


출가한 지 60년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스님들, 불자님들, 그리고 세간에 사는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아왔겠습니까.
구룡사에서 함께 하시던 캐나다 토론토 대각사 회주 양일 스님이 계십니다. 호적상으로는 35년생이지만 실제로는 아흔다섯이라고 하셨습니다.
며칠 전 스님께서는 입적하셨습니다. 11월 5일 날이 49재입니다.
보름 전 연락이 오기를, “스님이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계시다.”고 했습니다.
세속에서도 세상을 떠나면 ‘시달림’이라 하여 영가가 머무는 곳에 가서 천도 의식을 해 드립니다. 저 역시 어른 스님들의 입적을 지켜본 일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 마음으로 지난주 월요일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병원 중환자실에 다녀왔습니다. 스님께서는 혼수상태로 계셨습니다. 조용히 다가가서 “스님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세요. 스님, 제 목소리가 들리거든 제 손을 꼭 한번 잡아 보십시오.” 혼수상태에서도 스님은 제 손을 몇 번이나 꼭 잡으셨습니다.
마음으로는 무언가 전하려는 듯 몸을 조금씩 움직이셨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주 평안한 얼굴로 계시다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양일 스님께서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 내용을 전부 전해드릴 수는 없지만, 일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연히 이 세상에 와서 지옥의 찌꺼기만 남기고 가는 이 나그네가 죽거든 변호사와 장의사, 그리고 한국의 정우 스님께 연락하라. 911(우리의 119)에 전화해서 사망을 확인받고 장의사에게 연락하라.
모든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 영수증을 첨부해 두었다. 화장 후에는 재를 근처에 뿌려주고, 장례식은 따로 하지 말라.
내 죽음을 이웃이나 신도들에게 알리지 말고, 입은 옷 그대로 보내라.
제사니 49재니 100재니 하는 일로 힘들어하지 말라. 제삿날이나 생일도 잊어버려라. 이 몸은 따스한 봄바람이 되어 돌아오리니, 피고 지는 들꽃무리 속에 돌아오리라.”
양일스님의 임종게臨終偈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스님께 “좋은 곳에 다녀 어서 오십시요.” 단순한 작별의 인사가 아니라, ‘어서 편히 가셨다가 다시 오시라’는 인연연기의 인사이었습니다. 이렇듯 큰스님의 임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죽음’은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님을 늘 느끼게 합니다.
22년 전, 월하 노스님께서도 열반하실 때 그랬습니다. 주지스님 연락을 받고 통도사에 도착하니 새벽 3시 이었습니다. “스님 정우 왔습니다.” 하며 손을 잡아드리니, 그토록 힘들어 하시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 오셨습니다. 인생도 돌아다보면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는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원하던 삶이었을까?”
살아오면서 반성하고, 때로는 뉘우치지만, 후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반성과 뉘우침은 마음을 맑게 하지만, 후회는 좌절과 체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참 많은 일을 겪습니다. 어느 날 아무리 좋은 인연이 찾아와도, 내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서양 속담에 ‘두드려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두면 아무리 누가 두드려도 열리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여는 것이, 상대의 마음을 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닫게 만드는 가장 큰 병은 의심입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미움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불화의 씨앗, 만병의 근원은 바로 의심과 미움입니다.
『아함경』에서도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의심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대개는 의심하지 않음을 의심이라 하느니라.”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아.’ 그 순간, 이미 의심이 시작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며 중생을 교화해야 하는 귀한 존재인 승가입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어울림은 줄어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을 대할 때, 섭섭함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따뜻한 마음인 자비로움 으로 친절하게 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오늘이나 내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죽음을 먼 일로만 생각합니다.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오겠는가.’ 하는 생각,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은 곧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출가자는 가족과 떨어져 살지만, 승가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승가의 한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것은 결국 나의 한 부분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타인의 죽음은 나의 인생에 대한 예행연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재의 삶을 돌아다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묻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내 차례로 다가올 일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미리 준비하면 두려움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생전에 미리 자신의 장례 절차를 준비해 놓기도 합니다.
『열반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생을 마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이어집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이라 하였듯, 부모·형제·처자권속으로 맺어진 인연은 또 다른 생에서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은 저 세상에 계신 영가들도 잘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같은 인연은 다시 만남을 가집니다.
그러니 절대 구천을 떠도는 영가는 우리 곁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이 곧 우리들의 신심이고, 그 신심은 삶의 등불이 되는 보리심입니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이 누구에게나 다가오고 있는 인생의 매듭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엄숙하고, 또 한결같이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서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허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잘 죽는 일’은 곧 ‘잘 사는 일’과 직결되어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똑같은 뉘우침이라도 반성하는 뉘우침은 긍정적이지만, 후회하는 뉘우침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후회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뉘우침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궤도를 수정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듯, 인생의 방향도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을 바꾸는 긍정적 ‘마음의 본성’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인연 연기입니다. 그 인연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의 사랑, 그리고 자비심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서로의 삶에 온기를 전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동사섭同事攝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진 곳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준비이며,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길입니다.